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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br> "각 지부 지회 연희춤 공연에 집중한다"2022년에 대한민국 연희춤협회(한국 연희춤협회)가 창립되었다. 전국 20여 개 지역에 지부와 지회가 개설되었고, 얼마 전 캐나다에도 지회가 만들어졌다. 연희춤을 바탕으로 연희춤꾼이 펼치는 꾼들이 모여서 각 지역 연희춤을 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연희춤협회 문진수 회장을 지난 2월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가 개최되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만나게 되었다. Q. 지난해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전승 활동은 A. 2023년은 전통예술과 연희를 새롭게 해석하며 품격있는 춤과 융합하여 독립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로 재창조하고 연희춤의 지경을 더욱 확장하여, 다양한 시도를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선보이며 위상을 높이는 시간이었습니다. 2023년 한 해동안 대한민국연희춤협회의 국, 내외 각 지부, 지회에서도 활발한 공연과 전승활동을 통하여 연희춤의 예술적, 독보적 가치를 선보이고 이를 통하여 전통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희춤의 가능성을 보여준 몇 개의 연희춤 공연과 전통춤의 깊은 경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였던 몇 개의 공연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와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아시아 1인극 축제에서 선보인 검사 위의 백사(뫼비우스)는 12발 상모춤의 전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시대정신과 민중 저항성을 반영한 스토리텔링과 전통춤의 아름다움, 역동적인 12발의 기예를 융합하여 하나의 독립적인 공연 예술작품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민중의 소리를 듣고 예술을 통한 관객과의 소통, 공감을 의도한 작품입니다. 또한 계룡산 국제춤축제에서 초연한 산왕대신기는 뫼비우스의 스토리텔링에 이어 12발상모로 대변되는 두 마리 용과 계룡산의 산왕대신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12발 상모 연희, 신칼대신무 등의 춤, 전통 비나리, 재담을 통해 극적, 예술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희적 스토리와 함께 관객과 소통하면서 부정한 것을 정화하며, 인간의 삶과 희망을 대변하여 하늘로 전하고 기원하는 진정한 제(祭)와 굿의 의미를 실연(實演)하여 자연과 삶 속에 녹여내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입니다. 전통춤으로는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소리꾼 김보라 선생님과의 콜라보 공연이였던 소고 입춤과 발탈 보유자이신 박정임 선생님의 구음과 함께했던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_조선춤방] 이동안류 기본무와 팔박수건춤이 있었습니다. 소고 입춤은 소고 연희의 전통적인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재해석한 소고춤과 문진수류의 입춤을 엮어 재해석, 재창작한 작품으로 다른 류의 소고춤에서는 볼 수 없는 연희춤의 차별성과 품격을 춤과 소고연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박정임선생님과의 국립국악원 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를 통해서 故 이동안 선생님과 박정임 선생님의 깊은 예술 세계에 경탄하며, 창작과 재창조를 위해서는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정진을 통한 깊은 고민의 과정을 토대로 해야 함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연희 분야를 현대적 수용을 위해 재해석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무대를 보여주고 있는 문진수 회장은 남사당·승무·발탈·영광우도농악까지 4개의 무형문화재 이수자이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다. 그는 30여 년간 전통예술을 연마하면서 무용학 박사까지 마쳤고,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Q. 지난 해 문진수 회장님 개인적 전승활동은 A. 작년에는 코로나도 주춤해서인지 여기 저기 무대에 서는 날이 많아지더군요. 2023.01.27. 코리아그라피 우리소리 추어지다 (서울남산국악당)_ 전통을 복원한 소고춤, 전통입춤, 전통구음의 현대적 해석과 콜라보 2023.03.22 인천 서구립풍물단 심사(인천 서구립)_ 풍물단원 심사 2023.05.03. 전문직업인에게 듣는 진로이야기(의령문화원)_전통연희 진로와 방향 2023.05.11. 2023 정읍무형문화재 합동발표회(동학농민혁명기념제 황토현 특설무대)_ 정읍무형문화재 17호 악기장 전수자 2023.05.20. 통영오광대 정기공연_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05.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정기모임 및 지부, 지회장 임명장(추가) 수여식 2023.06.08. 찾아가는 문화재 발탈 공연(오산)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10. 김복희교수 대안적 현대박물관학 네트워킹 파티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6.14. 홍주향교 달빛타기_ 문진수류 12발 상모춤 초청공연 2023.06.18. 연희춤꾼 더 문진수의 소고춤 연수회_대한민국연희춤협회 2023.06.24.~6.25. ASIA 1인극제 거창 2023_ 검사위에 백사, 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6.30. 찾아가는 문화재 공연 발탈(수원)_채상설장구 초청공연 2023.07.15.~16. 대한민국연희춤협회 하계연수회 2023.8.12. 자계예술촌 제20회 산골공연 예술잔치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8.19. 2023년 국가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 공개행사(운현궁) 2023.08.27. 진해 전국국악대전 풍물심사(진해문화예술회관) 2023.09.15. ART FAIR HONGJU(아리랑뮤직)_문진수류 12발상모춤, 처용무 초청공연 2023.09.16. 대전상설공연(우암사적공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17. 2023 세계무형유산 VIRTUOSO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2023.09.23. 대전상설공연(대청댐)_ 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공연 2023.09.23. 아리랑뮤직 음악회_ 문진수류 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09.24. 2023 대한민국농악축제(강원감영)_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09.26 광양시 농악경연대회 심사 및 축하공연(광양시청)_채상설장구춤 공연 2023.10.09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한글날 경축행사(국립세계문자박물관)_남사당 덧뵈기, 열두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11. 아리랑뮤직 음악회(홍성)_채상설장구춤 초청공연 2023.10.14 오대산 문화축전_한강생명시원제(월정사)_신칼대신무, 버나놀이 초청공연 2023.10.19 사)한국국악협회 서울특별시 광진구지부 정기공연(광진나루 아트센터 대극장)_열두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0.25. 일이관지 조선춤방(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_이동안류 기본무, 팔박수건춤(박정임 구음) 2023.10.21.~10.22. 제28회 계룡산국제춤축제 산왕대신기_문진수류 덧뵈기춤, 소리, 신칼대신무, 12발상모춤, 버나놀이 공연 2023.10.28.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공개행사_문진수류 채상설장구 2023.10.29. 한국베트남 전통문화예술축제(인천시청)_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초청공연 2023.11.04. 개천사 비자나무숲 음악회(개천사)_버나놀이 2023.11.15. 배꼽마을 치유 축제(청성 장연리)_버나놀이 2023.11.18. 남사당놀이보유자 考박용태선생님 2주기 추모공연(대전 예맥아트홀)_ 남사당 덧뵈기 전과장 시연 및 이동안류 신칼대신무 공연 2023.11.25. 대전1인극 축제_ 화엄무변(문진수류 버나놀이(춤)), 문진수류 12발상모춤 초청공연 2023.12.12. 제44회 정명자 춤의 세계(한국문화재단 민속극장 풍류)_광대소고춤, 열두발상모춤 공연 2023.12.24 .오늘도 X-MAS는 춤춘다(고래문화재단)_버나놀이와 열두발 상모춤 공연 2023.12.27. 남사당과 함께하는 덩쿵~ 흥겨운 버나 놀이_버나놀이와 재담 공연 Q. 대한민국연희춤협회 소개해주세요. A. 2022년 대한민국연희춤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연희춤에 뜻을 같이하는 국내 및 해외 회원과 함께 2023년 협회창립모임을 통해 국내 및 해외 지부지회를 공식 출범하고 활발한 전승과 보전을 위한 공식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각 지부, 지회는 가(歌), 무(舞), 악(樂), 기예(技藝) 등 다양한 전통연희를 전승하고 활발한 공연과 교육활동을 벌이고 있는 전통연희 전수자, 이수자, 무용가, 문화운동가 등 전통연희와 예술 분야의 재원으로 풍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회장 문진수, 사무국장 이지원을 비롯하여 국내외 20여 개의 지부, 지회로 활동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Q. 지난해 성과는 A. 연희춤을 통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연구한 작품들이 감사하게도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희를 보시는 관객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전통연희를 연구하는 석학과 문화운동가들에게 연희춤의 훌륭한 가능성과 가치를 선보이며 받았던 좋은 에너지를 바탕으로 전통의 재해석 재창조한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환원하는 예술가로서의 본연의 작업에 정진할 수 있었던 뜻깊은 한해였습니다. 이러한 연희춤을 통해 전통연희를 재해석하고 창조하는 데 뜻을 모으며, 이를 구체적인 전승 활동으로 구현하기 위해 2023년에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 등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Q. 올해 역점 사업은 A. 연희지도사 및 무형문화유산 지도사에 적합한 최적의 교육과정을 구현하기 위한 전승교육과 전승지도사의 육성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하며, 각 지부 지회의 연희춤 공연과 전승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탤 예정입니다. 또한 개인적인 전승 활동과 연희춤에 끊임없이 정진하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과 만나고 소통하며 연희춤의 무변(無邊)하고 아름다운 가치를 또 한번 새롭게 조명하는 2024년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Q. 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문화의 힘이 곧 국력이자 국가의 100년 자산이 되는 글로벌문화 시대입니다, 전통문화의 흥과 멋, 예술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철학을 토대로 현대적 삶에 이를 새롭게 녹여내어 이상적인 가치로 풀어내는 예술가이자 문화운동가로서의 의식있는 연희꾼들의 뜨거운 실천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희꾼 스스로의 예술적 정진, 창조적인 도전과 더불어 전통예술에 대한 관심과 관리, 전승 교육을 위한 시스템과 재정적 지원 등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예술로서 창조하고 관객과 소통하는 상생 에너지가 재생산되어 다시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며, 예술을 매개로한 정신적 부흥으로 흥과 멋, 정이 흐드러지는 모든 공동체의 기운생동(起運生動), 상생(相生)의 문화부흥 시대를 기대합니다. 문진수 -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이수자 -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이수자 -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승무 이수자 -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7호 영광우도농악 이수자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악기장(북, 장구) 전수자 - 한양대학교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 사단법인 광양버꾸놀이보존협회 부이사장 - 사단법인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보존회 이사 - 사단법인 남사당 대전지회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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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춤협회, 한국전통춤협회, "전통춤문화제 수건춤 100년사" 성료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이사장 한혜경)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학계에서는 이번 수건춤 100년사 재현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첫째날 해설을 맡은 원로 전통춤연구가 이병옥 교수는 수건춤은 교방춤, 재인청춤, 무속계열춤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다 보여주는 판이 벌어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둘째날 해설을 맡은은 양종승 박사는 수건춤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전통민속예술 수건춤의 지속과 변용을 보여준 학계의 평가다. 이 행사장에서 한혜경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Q. 한국전통춤협회 언제 창립되었나요. A. 한국전통춤협회 창립을 위해 2012년 7월 7일 창립추진위원회(위원장 채상묵, 위원 김정녀, 한혜경, 양종승, 김은희, 진유림 등 7명)가 결성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7년 4월 6일 정부로부터 공식 사단법인이 인가되었다. Q.설립 취지는. A. 한국 전통춤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따라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임회원 모두는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전통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 대외협력, 춤 콩쿠르 등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Q. 한국전통춤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한국전통춤창립추진위원회가 2012년 발족되고 위원장으로 채상묵 교수를 모셨다. 한민족예술의 정수, '한국전통춤'을 널리 알리고자 각 장르별 전통춤보존회로 구성되어 창립된 국내 유일한 협회이다. Q. 한국전통춤협회 창립 취지는? A. 전통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취지를 펼치고자 전국 전통춤을 전승하고 있는 보존단체가 협력 관계로 뭉쳤다. 2012년 초부터 민족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를 위해 회합을 갖고 범 전통춤 관련자 모임을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결실을 맺고자 우리는 한국전통춤협회 창립과 더불어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더욱 분발하고자 한다. Q. 초대 위원에는 어떤 분이 동참하셨는지요? A. 채상묵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김정녀(예능), 한혜경(예능), 양종승(연구), 김은희(예능), 진유림(예능)으로 출범했다. Q. 한국전통춤협회은 초대 이사장은 A. 초대 이사장 채상묵, 2대 이사장 이길주에 이어 3대 이사장은 제가 맡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주요 사업으로 <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 <한국춤 차세대전>, <한국춤 학술세미나>, <전통춤 학술총서 발간>, <한국춤 대경연>, <한국전통춤 보물전 해외 공연>, <전통춤 연수회>, <한국춤 전국지부공연>, <대한민국전통춤 예술대상 시상식>, <대한민국전통춤 4대 명무상 시상식> 등이 있다. 전통춤 발전과 보급을 위해 제1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참가 부분은 학생부, 일반부, 명인부, 신인부로 나누었고. 김숙자 명인상, 이매방 명인상, 한영숙 명인상을 제정했다. 장르는 전통춤에서 타악춤, 창작무용까지 확장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규정을 엄수하고 진행은 투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Q.올해 역점 사업은 A.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첫째날에는 이병옥 교수의 해설과 함께, 최지원의 군무 동초수건춤, 박은하의 살풀이춤, 이지은의 도살풀이춤, 고재현의 군무 교방입춤, 이정애의 쌍수건춤, 김진원의 살풀이춤, 이미숙의 군무 경기수건춤이 펼쳐졌고,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 열렸다. 올해에도 제2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국전통춤협회는 해외 지부를 거점으로 미국 및 유럽과도 연결하여 한국의 전통춤 보급과 전수 활동을 펼치려는 계획하고 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씀은 A.유구한 역사속에서 우리선조들의 피눈물나는 질곡의 삶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존및 계승ㆍ발전이라는 사명감에 오늘 날 찬란한 국악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작금의 국악계는 온전한 계승의 문제점을 안고있다고 보고있다. 찬란히 빛나야 할 우리의 국악발전은 염두에 있지아니하고 이권 다툼과 계파싸움이 팽배해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의 후학들과 후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줄수 있을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부분이라고 생각한다.문화유산은 먼저 올곧은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습득하고 터득된 예술세계를 물려줌이 마땅하다고 본다. 서로 일보양보하고 화합하여 개인의 영리보다는 국악계의 발전을 꾀해야 할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국악유산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보존 및 계승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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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 성료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백수연, 하수연, 김주연, 유지숙, 나현아, 임정민, 김희영, 임예린),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주원, 장보름이, 김영찬, 송창현, 김율희, 이병근, 엄아라, 이유담)이 무대를 열었다. 둘째날 선사된 7인 7색 수건춤 작품은 수건춤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양종승 박사는 "수건춤은 거슬러 올라가면 신앙 의례로 시작된 춤이었고, 그것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무대 예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전문 예인집단의 놀이춤, 교방-권번 기녀의 향연춤 그리고 오늘날 무대 예술의 문화재춤으로 거듭났다. 이어 "이번 공연은 그러한 전통 수건춤의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전승과정에서 미학적으로 꽃피어진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감동적 무대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옛 정신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대적 가치를 담아낸 지혜로운 춤판, 그 속에 큰 세상으로 나아 가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기에 더욱 의미있었다"고 전했다. 1990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된 수건춤은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첫째날 해설을 맡은 원로 전통춤연구가 이병옥 교수는 "살풀이는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액(厄)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살(煞)을 푸는 춤으로 일명 도살풀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그 해의 액을 풀기 위하여 굿판을 벌이고 살을 푸는 춤을 추어 왔으므로 무속(巫俗)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수건춤은 교방춤, 재인청춤, 무속계열춤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다 보여주는 판이 벌어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수건춤은 행사에서 빠지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예술성을 인정하여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번 수건춤 100년사 재현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독무와 군무로 웅장하게 펼쳐진 무대는 우리가 지켜 나아갈 전통춤의 지속과 변화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전통춤협회 한혜경 이사장은 "전통춤 전승자, 연구자,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한국전통춤협회가 준비한 한국의 수건춤 100년 역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값진 무대이다. 독무과 군무 무대를 구성하여 수건춤의 예술성과 진수를 선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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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 "'수건춤100년사'를 무대에서 만나다"(첫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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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춤협회, '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 개최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이사장:한혜경)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한다고 16일 전했다. 첫째날에는 이병옥 교수의 해설과 함께, 최지원의 군무 동초수건춤(김희진, 김보람, 지다영, 윤초아, 강경애, 양소윤, 정다은, 우지윤), 박은하의 살풀이춤, 이지은의 도살풀이춤, 고재현의 군무 교방입춤(주진희, 이승용, 김현아, 정혜인), 이정애의 쌍수건춤, 김진원의 살풀이춤, 이미숙의 군무 경기수건춤(고은이, 김민주, 김선혜, 김윤자, 김지은, 김학영, 박수진, 박재원, 윤혜성, 이지현, 이희준)이 펼쳐진다.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백수연, 하수연, 김주연, 유지숙, 나현아, 임정민, 김희영, 임예린),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주원, 장보름이, 김영찬, 송창현, 김율희, 이병근, 엄아라, 이유담)이 무대를 연다. 한혜경 이사장은 "전통춤 전승자, 연구자,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한국전통춤협회가 준비한 한국의 수건춤 100년 역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값진 무대이다. 홀춤(독무)과 군무 무대를 구성하여 수건춤의 예술성과 진수를 선사할 것이다.”고 전했다. 공연문의 및 티켓문의는 010-635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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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명무 정명자의 춤판 열린다12일 오후 7시 민속극장 풍류에서 전통춤 평론가 이병옥 교수의 해설이 있는 '정명자 춤판'이 열린다. 전통춤을 계승하는 명무 '정명자의 춤의 셰계'는 올해가 44회가 된다. 특별출연으로 문진수 춤꾼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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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어울사랑 송년음악회, 이병옥의 '나마스테 아리랑 판타지'마리소리음악연구원에서 오는 12일 오루 5시 서초동 SCC선아트홀에서 송년음악회를 개최한다. 어울사랑예술단 황경애 예술감독 연출과 임병걸의 진행으로 이루어진다. 어울사랑예술단, 기타반, 그리고 마리소리골악기박물관 기타반이 무대를 꾸민다. 특별출연으로 독일공연에 함께 했던 어울림단원들도 참여하여 이번 공연을 빛내줄 예정이다. 첫막은 '새가락놀량' 작품(이은기의 가야금. 이석종의 장구)이 막을 올린디. 기타반이 '추억의 소랜자라'를 선보인다. 이병옥 작곡의 '나마스테 아리랑 판타지'가 이병옥의 기타로 연주된다. 이어 '실내악단 이병욱과 어룰림'의 달항아리가 선사된다. 휘날레는 출연진 전원이 '서울로 가는길(김민기 시, 곡, 이병욱 편곡)을 대합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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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2)불치(佛齒) 수호의 문화유산과 캔디안 댄스 스리랑카가 우리나라에서 가깝지 않고 외모도 사뭇 다른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양국이 고대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쯤 북인도의 신할리족(Sinhalese)이 이주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운 나라로서 일찍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곳곳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 담불라(Golden Temple of Dambulla, 黃金寺院) 중세시대의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 기행을 오전에 마친 일행들은 전용버스로 3시간을 이동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과 황금사원이 있는 담불라로 갔다. ‘담불라(Dambulla)’는 ‘바위(Damba)’와 ‘샘(Ulla)’이 합쳐진 말로 기원전 1세기에 180m 높이의 바위산 중턱의 자연동굴에 승려들이 기거하며 조금씩 다듬어 만든 사원이다. 바위를 파낸 5개의 석굴 안에는 불상과 신상(神像) 157개가 안치되어 있고,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빛깔의 벽화가 빽빽이 그려져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제2굴인 마하라자 비하라(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제1굴에는 열반에 드는 불타, 제3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제4굴에는 2,000년 전에 보석을 넣었다는 불탑이 보관되어 있고 제5굴에는 조각상과 20세기 초에 그린 벽화가 있다. 1991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시기리아(Sigiriya) 바위산 궁전에 얽힌 왕위 계승에 관한 전설과 압사라 댄스 시기리아(Sigiriya) 고대 도시는 카사파 1세(Kassapa I, 477~495)의 치세 동안 실론(Ceylon) 문명을 보여 주는 유일한 유적이다. 특히 바위산 정상에 건설한 시기리아(Sigiriya) 궁전은 현지어로 Sigiri(Lion사자)와 Ya(Rock 바위)라는 두 낱말이 합해진 ‘사자 바위(Lion's Rock)’란 뜻이다. 이 유적은 가파른 경사면과 사방을 에워싼 정글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높이 370m의 화강암 봉우리 정상에 있는 왕궁터에 요새화된 궁전, 폐허가 된 건물들, 저수조들, 암각 조각들이 있다. BC 5세기에 요새왕궁으로 건축된 이 성채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물이지만 명성만큼이나 슬픈 사랑과 사연을 품고 있다.5세기 스리랑카의 다투세나 왕(Dhatusena King)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왕족이 아닌 천민이었기에 슬픈 사랑의 얘기는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서부터다. 그러나 다투세나왕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족은 천민과의 결혼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의 율법 때문에 다른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다투세나왕에겐 천민 여인이 낳은 맏아들 카샤파 왕자와 왕족출신의 왕비가 낳은 둘째 아들 목갈라나(Moggallana)왕자가 있었는데 천민출신 큰아들이 후일 카샤파 1세 왕자가 된다. 그러나 천민출신 성분 때문에 왕족 혈통인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늘 우려 하다가 절대권력자인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분노한 동생 목갈라나는 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다.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은 이들 후환이 두려워 부하를 시켜 아버지 부왕까지 살해하고 만다. 카샤파 왕은 아버지를 살해한 죄의식과 인도로 망명한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난공불락인 시기리아 정상인 해발 370m 바위산 꼭대기에 7년의 긴 세월을 들여 철통같은 요새 시기리아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망명 11년 후 복수를 위해 세력을 키워 돌아 온 이복동생 목갈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카샤파 왕은 쓸쓸하고 비참한 자결을 택한다. 이 궁전을 짓는데 걸린 기간이 7년, 입궁하여 꾸미는데 4년, 도합 11년의 긴 세월을 공들였으나 그가 완성된 궁전에서 기거했던 기간은 고작 반년이었다.결국은 비극으로 끝난 한 왕가의 운명적인 몰락의 역사가 서려있는 시기리야 바위산 왕궁 폐허를 답사하고 내려오면서 신분, 권력, 사랑, 영화에 대한 애달프고 인생무상한 이야기는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끔찍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타지마할 역사 이야기보다 더 서글프고 안타까워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내려오는 서쪽 암벽 중간쯤에 알려지지 않은 18명의 여인들 모습이 그려진 ‘시기리아의 여인(Sigiriya Lady)’, ‘천상의 여인들(Maidens of the Clouds)’ 또는 ‘천상의 무희(Apsara)’로 불리는 바위그림이 있었다. 아잔타(Ajanta)의 가장 아름다운 벽화와 비교할 만한 이 바위그림으로 인해 시기리야 고대 도시는 세계 고고학 미술계에 찬사를 받게 되었다. 본래는 시기리아 바위산에 500명의 여인 벽화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겨우 남아있다. 여기서 귀가 쫑긋해지는 이야기는 정상 왕궁터 대리석 옥좌(Throne)에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Apsara)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좌 등받이 뒤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수로를 두어 왕의 더위를 식혀주었다고 한다. 압사라(舞姬, 妖精, 飛天, 仙女, 天使)의 범아시아적 특징 시기리야 벽화 속의 수많은 여인들의 체형은 건강하게 살이 오른 풍만한 관능미를 가진 예사롭지 않은 미인들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가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모습과 상반신을 벗은 채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힌두교와 불교의 천상세계의 여인, 즉 압사라(천상의 요정)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압사라는 일단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벽화의 춤추는 요정을 떠올리는 크메르족의 전통춤을 뜻한다. 그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왕실무희들이며 힌두의례와 관련한 천상의 요정이다. 역시 불교국가에서도 이를 비천(飛天, 樂天 : apsara)이라 하여 항상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하늘을 떠도는 천인(天人)으로 1세기 전후부터 널리 조형화하고 있다. 인도 전래의 한국불교 사찰 벽화나 범종 부조에 나타난 비천상(飛天像, 주악비천, 공양비천, 무용비천) 역시 압사라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 상의를 벗고 있는 모습은 열대지방의 보편적인 고대사회의 풍습이다. 이러한 탈의(脫衣) 모습은 한중일 등 온대지방마저도 불상이나 비천상의 대부분이 상체는 벗거나 가사를 걸친 정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기리야 압사라 벽화에는 대체로 꽃을 받치는 형상은 불교 비천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압사라들은 팔과 손과 손가락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불상마다 손과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불교 수인법(佛敎 手印法)과 같은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다. 힌두교 창세신화 〈우유바다 휘젓기〉와 압사라 탄생과 춤 압사라(Apsara)는 원래 인도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그 어원은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이다. 이는 힌두교의 천지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Sagara Manthan, The churning of the sea of milk)’에서 비롯한 것으로 신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항상 힘이 약한 데바(Devas, 善神)들은 아수라(asuras, 惡神)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데바들은 우주와 질서의 신 비슈누(Visnu)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비슈누는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암리타(Amrita, 영생의 약)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데바들의 힘만으로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암리타를 꺼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비슈뉴가 꾀를 내어 아수라들에게 암리타를 나누어 줄 테니 함께 우유의 바다를 휘젓자고 제안한다. 아수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선신과 악신들이 우유의 바다를 천 년 동안 함께 휘젓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조각과 그림들은 세상의 중심인 만다라산(Mount Mandarachala)을 중심으로 비슈누가 가운데 있으며 양쪽으로 데바와 아수라들이 나누어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거대한 뱀의 왕(Vasuki)의 몸통을 함께 휘젓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품 속에서 약 6억 명의 압사라(apsara, 선녀)가 탄생하였다.특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제3회랑 동쪽 벽의 거대한 천지창조 장면에는 우유바다를 휘젓는 물결 속에서 수많은 압사라가 태어나 하늘을 나는 신비로운 장관을 볼 수 있다. 크메르 정권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한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우리의 궁중춤처럼 정적이며 지루하다 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리고 행동반경도 제한적이며 절도가 있고 엄숙한 춤이다. 우아한 전통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 유연하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다양한 손가락춤과 손목춤이나 발목 꺾음과 뒤로 들기 같은 말초부위 춤사위는 남방춤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부처의 진신 치아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1월 8일 아침 두 번째 수도 담불라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세 번째 수도 캔디로 출발하였다. 이번 춤기행에서의 핵심이 캔디안 댄스를 관람하고 스리랑카 전통춤의 종류와 춤사위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가장 기대가 컸다. 캔디에서 부처의 진신 치아 사리(佛齒)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Dalada Malgawa)’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요지이다. 치아 사리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모니 다비식(화장)때 입수한 것으로 서기 362년 인도 남부의 작은 나라 칼링가(Kalinga)왕국의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숨겨온 사리를 스리랑카 왕에게 바쳤고, 이후 불치는 독실한 불교국가이기에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개방되는 불치사 참배는 자유롭지만 치아사리가 있는 방이 열리는 것은 하루 세 번(오전 6시, 11시 30분, 오후 6시 30분) 공양을 올리는 푸자(Puja)의식 때이다. 이때 참배객들은 꽃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불치사 참배는 스리랑카인들의 평생소원으로 스리랑카 사람 마음속에 불치사가 간직되어 있다. 캔디 불치사를 중심으로 펼치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캔디의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는 불치사에 있는 성스러운 불치사리를 옮기는 의식을 재현하는 축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에살라’는 ‘음력 7월’을 뜻하며 그래서 이 축제는 음력 7월 중에 약 11일간 매일 밤 열린다. 이 축제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그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캔디안 댄스 극장에서 선보인 전통춤들 불치사 근처에 있는 캔디안 댄스극장(Oak-Ray Kandynn Dance)은 빌딩 공간을 개조한 간이 소극장으로 옹색하였고 이미 외국인들로 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가운데 통로 맨 앞자리에 허락과 양해를 구하며 의자를 옮겨 자리 잡았다.마굴 베라(Magul Bera, Ceremonial Drums): 시작을 알리는 나각(螺角, 소라나팔)을 불면 격렬한 드럼(BERA)연주 의식을 하는데 이는 고대 토지의 수호신에 알리는 의례 관습에서 비롯되었고 전통적인 환영 연주이다.푸자의식춤(Puja Naturna, Pooja Dance): 오일 램프를 들고 있는 여인들이 부처에게 제물로 바치며 기도하는 의식을 표현하며 우아한 춤을 춘다. 락샤춤(Raksha Natuma, Devil Dance): 락샤(Raksha)는 축귀(逐鬼), 치유(治癒), 악령(惡靈), 악마(惡魔) 등을 뜻하며, 18개의 남쪽 스리랑카 가면을 쓴 춤은 악한 기운을 물러가게 하고 환자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춘다. 이 춤은 귀신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며 여전히 스리랑카에서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로 여겨지고 있다. 뱀춤(Naga Raksha, Cobra Snake)은 잡신의 위협과 퇴치의 뜻이며, 새춤(Gurulu Raksha, Mythical Bird Dance)은 신화 속의 독수리로 이를 상징하는 탈을 쓰고 공연하는 춤이다.판테루 나투마(Pantheru Natuma, 出征舞): 판테루는 탬버린과 유사한 악기를 들고 드럼반주에 맞춰 흔들며 활발한 곡예기술(공중돌기, 회전무)과 손재주를 보이며 춤을 춘다. 이 춤은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을 표현한 것으로 출정무(出征舞)라 할 수 있으며, 캔디안 댄스 중에서 가장 박력 있는 남성춤이다. 마유라 나투마(Mayura Natuma, Peacock Dance): 화려한 공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유라 나투마는 신화에 따르면 스리랑카 전쟁의 신으로 불교와 힌두교가 경배하는 ‘스칸다(Skanda)’를 운반하는 공작새로 고맙게 묘사하는 여성춤이다. 또한 공작새는 보편적으로 평화와 조화를 가져 오는 상징성으로 밝은 흰색과 파란색 의상을 입는다.라반 나투마(Raban Naturma): 라반춤은 손북(Ath-Rabana, Hand Tambourine)을 들고 추기도 하고, 한국의 버나(남사당 접시돌리기)처럼 손가락이나 막대를 받쳐 회전시키는 다양한 곡예무로 발전한 전통 민속춤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 살루 팔리야(Salu Paliya)는 악령에 사로잡힌 환자에게 여신(Pattini)의 축복과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에 흰목도리를 걸치고 등장한다. 여신 파티니(Pattini)는 스리랑카의 힌두교와 불교 공동체 모두에게 경배를 받는 신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가 광대처럼 행동하여 환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제 2단계의 치유의식으로 우스꽝스런 가면춤을 춘다.베스 나투마(Ves Natuma): 베스춤(ves Natuma)은 캔디안 댄스 형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춤이다. 이 춤의 기원은 고대 퇴마의식춤인 ‘코호모 칸카리야(Kohomba Yakuma, Kohomba Kankariya)’에서 유래 된 것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춤이다. 춤은 저주의 악령을 달래는 의식으로 남성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 〈전설 내용은 1편 캔디안 댄스 참고〉 이들은 태양의 광선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60개의 장식품으로 된 전통적인 베스(ves)복장을 입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헤드기어(head gear)모자를 쓰고 게타베라야(Getanderaya,Kandyan Drum)라는 북소리에 맞춰 역동적이고 정교한 춤을 춘다. 이 춤의 댄서가 되려면 몇 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인정받고 춤을 출 수 있다. 특이한 춤사위로 한국농악의 채상모놀이처럼 헤드기어의 긴 띠를 휘돌리기, 점핑춤, 공중돌기, 치맛자락 잡고 춤추기, 한국 강신무처럼 왼쪽으로 빠르게 돌기 등이 있었다. 쿨루브 나투마(Kulub Natuma, Harvest Dance): 쿨루브춤(Kulub Natuma, Harvest Dance)은 농부들이 곡식이나 실론 차잎을 수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행한 민속춤으로 키춤, 차잎 뜯기춤(Tea Plucking Dance) 등이 있다. 반주는 가벼운 드럼 비트와 플루트 연주이다.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 드럼은 캔디안 댄스에 ‘게타 베라(Geta Bera)’, 저지대춤에 ‘야크 베라(Yak Bera), 사바라가무와춤에 ’다불라(Davula)‘ 반주로 춤을 춘다. 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에서는 주로 게타 베라야(Geta Beraya), 야크 베라야(yak Beraya), 탐마타마(Thammattama)로 리듬 연주했으며 그밖에 시작할 때 소라연주가 있었고,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에 스리랑카 악기에는 우데키야(Udakkiya), 타빌(tavil), 플루트(floot), 라바나(rabana) 등이 있다. 지니 시칠라 불춤(Gini Sisila, Fire Dance): 지니 시칠라(Gini Sisila, Fire Dance)는 불을 뛰어 넘는 마력과 인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27개의 악령과 불에 대항하는 신성한 퇴마의 힘을 보여주는 남부지방 불춤이다. 불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으로 화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이 댄스에는 불을 먹는 아찔한 묘기춤(Fire Eating Dance)도 춘다.불판걷기(Fire walking): 맨발로 불판걷기의 근원은 라마(Rama) & 시따(Seetha)의 서사적인 사랑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론의 왕 라와나(Rawana)는 인도의 공주인 시따(Seetha)를 인도에서 납치했다. 시따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키 위해 화장의례에 사용되는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불속에 들어가자 불의 신 아그니(Agni)신이 나타나 시따를 들어 올려 라마에게 시따의 순결을 입증해주었다. 그 후 라마는 왕이 되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에서 불판걷기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마지막 여정들(핀나왈라, 콜롬보, 갈레포트) 1월 9일 아침 핀나왈라 코끼리 고아원(Pinnawala Elephant's Orphanage)을 방문했다. 이곳은 정글에서 부모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다치거나 병든 코끼리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건강을 회복한 코끼리들은 사찰이나 코끼리 사육사(조련사)들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코끼리들을 아침 10시와 오후 2시에 반씩 나누어서 목욕을 시키기 위하여 40-50마리를 데리고 강으로 나온다. 1월 10일 드디어 스리랑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전 호텔에서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었다. 캔디안 댄스에서 봤던 베스댄스를 혼례 의식춤으로 축하를 하며 전통 결혼식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진행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옛 수도 콜롬보(Colombo)에 도착하여 해양박물관과 갈레포트(Galle Fort)와 전통낚시(stilt fishing)을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고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향하여 밤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스리랑카 왕조 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진신(眞身) 치아(齒牙)를 모셔온 1800년 동안은 불치 수호의 역사였으며, 불치(佛齒)는 왕조의 존재 가치를 담을 만큼 소중한 왕권의 상징인 ‘국새(國璽)’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를 널리 받아들인 것은 ‘왕즉불(王卽佛) 사상’, ‘호국불교’를 이용한 것이긴 해도 스리랑카 국민들(70%)이나 왕들은 지나치리만큼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현재까지 살아온 것 같았다. 또한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3개 문화권으로 전승되고 있었으며, 그중 캔디지역이 가장 대표적인 춤문화권이며 세부적으로 여러 종목의 춤들이 전승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스리랑카의 고전춤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댄스(ves Natuma)는 여러 타악반주와 채상돌리기, 땅재주 등 다양한 기법이 한국의 농악과 유사성이 많았고, 오랜 동안 불치를 지켜온 페라헤라축제는 스리랑카의 전통문화의 전승의 요람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이병옥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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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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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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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와 탈춤 체험, '기억과 기록 – 탈춤편'탈춤의 뿌리에서부터 여러 춤의 갈래를 만나볼 수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 기획공연!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탈춤의 가치. 자유와 소통, 멋과 신명이 지금 우리 곁에 다가온다. 마음을 담아내는 몸의 언어, 기억과 기록 '탈춤편' 인류무형유산 탈춤 체험 기획공연 '기억과 기록 – 탈춤편'이 오는 21일 민속극장 풍류 무대에 오른다. 한국문화재재단이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공연으로, 대담과 시연을 통한 탈춤 소개, 관객들이 탈춤을 배워보는 체험으로 구성됐다. 공연은 국립박물관·국립국악원 등 고문헌과 아카이브 자료에 담긴 탈춤 기원과 시대별 기록 등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이병옥 명예보유자,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이수환 전승교육사, 국가무형문화재 고성오광대 이윤석 보유자와의 대담과 탈춤 공연이 펼쳐진다. 1960~1980년대 옛 필름 기록을 통해 명인 3명의 스승인 고(故) 허호영, 고(故) 허종복 등 선대 예인들의 춤사위도 감상할 수 있다. 공연 후 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실황 영상이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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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한국 전통춤 계승과 발전방향문화론적 시각과 미래 방안 1. 전통춤 패러다임과 계승 문제의 접근방법 문화는 시대가 변하고 사회환경이 변함에 따라 새롭게 적응하면서 변천한다. 따라서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발전하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형성되며 춤의 양상(樣相)과 양태(樣態)도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모(變貌)한다.서양춤의 변모는 고대의 의식적(儀式的)인 리투얼 댄스(Ritual Dance)로부터 중세 포크댄스(folk dance)와 코트댄스(court dance), 절제와 균형의 합일을 강조하는 18세기 클래식 발레(Classical Ballet), 꿈과 이상의 도약을 향한 19세기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의 주관적인 형식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창조된 모던 댄스(Modern Dance)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쳐 왔다. 한국춤 역시 고대의 제천의식춤(祭天儀式舞), 중세의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민속춤(民俗舞), 근세의 궁중춤(宮中舞), 민속춤(民俗舞), 종교의식춤(宗敎儀式舞), 현대의 전통춤(傳統舞), 창작춤(創作舞), 외래춤(外來舞) 등 각 시대별로 주요한 패러다임(paradigm)이 존재해 왔으며, 또 각 시대별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구시대의 패러다임이 대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의상 우리는 근대이전 시대의 전통양식을 갖춘 춤들을 통틀어 ‘전통춤’이라고 하고 근대 이후에 유입된 발레와 모던댄스를 ‘외래춤(외국춤)’으로 구분한다. ‘한국춤’은 협의로 전통춤과 한국창작춤을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광의로 한국에서 한국인이 추는 외래춤까지도 포괄하기도 한다. 명칭도 한때는 ‘신무용’, ‘고전무용’, ‘한국무용’, ‘민속무용’, ‘전통무용’ 등으로 두서없이 부르기도 하였고, ‘무용’과 ‘춤’도 혼용하여 현재도 사용하고 있다. 근대는 갑오경장 이후 서구 열강들과 교류가 시작되면서 모든 문물이 서서히 유입되고 변화양상을 보이면서 1902년 협률사의 등장으로 과거에 궁중과 기방 등에서 추던 춤들이 최초로 극장공간과 공연문화가 태동하면서 극장춤으로 시도되었다. 외국춤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1920년대 이후는 발레와 현대춤이 자리 잡아 가면서 전통춤과 창작한국춤과 함께 한국춤계를 주도하며 저변을 확대해갔다.이에 근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춤의 계승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 문화론적 시각에서 계승문제를 접근하고 미래 발전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전통춤 계승에 관한 다양한 문제점 중에서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제기하여 계승문제를 파악하기로 한다.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2. 전통춤 현황과 접근배경 1) 전통춤 종류와 무형문화재 지정종목 현황 한국의 전통춤도 시대변천에 따라 부침(浮沈)을 계속하면서 현대까지 전승되었다. 이상은 전통춤 분류와 몇몇 종목의 예시일 뿐이고 근현대로 전승한 궁중춤 50여종, 무당들의 무구춤 300여종, 재인청춤(화성 50여종, 안성향당춤 40여종)과 전통예인들이 전승한 춤(한성준 80여종, 김인호 30여종, 김덕명 20여종) 등등 정병호 정리 370여종을 포함한 필자 조사 1000여종의 전승춤 등 수없이 많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강강술래(8호, 소리춤), 진주검무(12호), 승무(27호), 승전무(21호), 처용무(39호), 학연화대 합설무(40호), 태평무(92호), 살풀이춤(97호) 등 8종이며,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춤종목은 한량무(서울45호), 살풀이춤(서울46호), 동래학춤(부산3호), 동래고무(부산10호), 동래한량춤(부산14호), 승무·살풀이춤(경기8호), 안성향당무(경기34호), 고깔소고춤(경기56호), 승무(대전15호), 입춤(대전21호), 살풀이춤(대전20호), 승무(충남27호), 살풀이춤(대구9호), 호남살풀이춤(전북15호), 한량춤(전북44호), 호남산조춤(전북47호), 예기무(전북48호), 진주한량무(경남3호), 진주포구락(경남12호), 진주교방굿거리춤(경남21호), 범패와 작법무(인천10호), 날뫼북춤(대구2호), 수건춤(18호), 진도북춤(전남18호), 화관무(황해4호), 평양검무(펑남1호), 부채춤(평남3호) 등 27종이 있다. 그밖에도 중국 동북3성 등지에서 전승되는 조선족춤 중에도 많은 춤종목이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즉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족농악무(象帽舞、乞粒舞)를 비롯하여 길림성의 조선족아박무(牙拍舞, 안도현), 조선족부채춤(연변주), 조선족칼춤(도문시), 조선족원고무(도문시), 조선족학춤(안도현), 조선족접시춤(훈춘시), 조선족장고무(도문시), 조선족손북춤(手鼓舞, 도문시), 조선족방치춤(棒槌舞, 도문시), 조선족상모춤(연변주, 국가급), 조선족삼노인(화룡시), 조선족탈춤(도문시), 조선족칼춤(연변주), 조선족찰떡춤(떡메춤 打糕舞, 연변주), 요녕성의 조선족농악무(农乐舞, 乞粒舞, 본계), 조선족탈춤(철령), 흑룡강성의 조선족접시춤(碟子舞, 감남현), 조선족물동이춤(顶水舞, 목단강시), 조선족아박무(牙拍舞, 해림시) 등 20여종이 지정되어 있다(2012년 목록). 2) 전통춤 계승문제의 접근배경전통춤 계승문제를 분석하는 도구로 <문화의 5대 특성>과 <문화인류학적 3대 시각>에서 전통춤의 계승문제를 분석하고 나타난 문제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는 발전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현대생활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문화(culture)’는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 5대 특성(속성)을 가진다.① 학습성(후천성): 인간의 문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학습된다는 것이다. ② 공유성: 인간은 서로 공통된 행동과 생활양식, 즉 서로 고유한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③ 축적성: 문화는 서로 발달하고 상호작용하며 축적되면서 진보하게 된다.④ 변동성(다양성): 축적되는 문화를 통해서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변동하여 발전한다.⑤ 전체성(통합성): 문화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비슷하게 연관되어 통합성을 지닌다. 또한 문화인류학의 문화에 대한 시각에는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또는 cultural relativism)’ 그리고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이 있다(한상복 외, l985). ①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문화는 생활양식의 여러 측면, 즉 정치, 경제, 법률, 가족, 친족, 종교, 예술, 관습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생활관습이라든가 사고방식, 생산양식, 인간관계, 신앙생활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그 문화와 관련된 많은 항목들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 설명해야 의미관련(relevance)을 좀 더 명확하고 본질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승무는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무엇으로 추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파악하여야 하는데 흔히 춤사위와 계보 수준에서 머물면 그 춤의 총체적인 면을 알 수가 없이 춤동작만 하게 된다는 것이다. ②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cultural relativism)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회적 맥락과 그 민족의 생활사(life history)를 이해하려는 것으로 타문화를 함부로 평가 비하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자세이다. 어느 민족의 문화이건 각기 역사와 가치,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에 대해 편견이나 ‘자민족중심주의(문화국수주의, ethnocentrism)’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은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는 아무리 미개민족의 하찮은 민속춤이라 할지라도 예술적으로 뛰어난 발레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거나 자기 민족춤은 우수하고 타민족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그동안 근현대기를 지나면서 한국전통문화를 우월하게 놓거나 비하하는 수많은 사례를 겪으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통춤에서도 한국과 여타 아시아국의 춤에 대해 비교우위나 비하의식이 남아있고, 무형문화재 지정춤과 비지정춤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서 추종과 외면현상으로 수많은 춤들이 소멸되는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흔히 궁중춤은 품격이 있고 민간춤은 저급하다는 시각과 문화재 지정춤은 우수하고 비지정춤은 열등하다는 시각은 그릇된 태도이며 다같이 소중한 한국전통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③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비교론적 시각은 두 지역 이상의 민족이나 지역의 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유사성 또는 공통점과 상이성을 명확히 규명하여 ‘보편화(普遍化, generalization)’하고 ‘특정화(特定化, specification)’하는 것이다. 즉 인간사회와 문화의 본질을 ‘일반화(一般化)’하는 관점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영숙살풀이춤(재인계, 서울중부지역)과 이매방살풀이춤(기방계, 호남지역), 김숙자살풀이춤(신당계, 경기남부지역) 등의 보편성과 일반성, 지역성, 공통성, 상이성 등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3. 전통춤 계승의 문제점 1)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문화환경적 관점에서 볼 때 전통춤은 이러한 특성에 맞게 잘 전승하고 있는지 파악해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전통춤 계승에서 나타난 문제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외래문명 범람에 대한 국가사회적 대처능력 문제 –정책과 여과능력 부재 국권마저 상실했던 근대시기에 아무런 대응과 여과 없이 일본을 통해 서구문명이 유입되었다. 1926년 이시이바꾸(石井漠)을 통해 서구 현대무용이 유입되었고, 최승희, 조택원들이 제자로 일본유학을 다녀와 한국무용계를 주도하였다. 미국을 위시하여 유럽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레와 현대무용이 유입되어 한국무용계에는 한국무용(전통춤 포함), 현대무용, 발레의 삼분법으로 대학무용학과가 설립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② 외래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주의 문제- 열등주의와 사대주의 19세기말 갑오경장(1894)으로 구시대적 문물제도를 버리고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는 개혁을 기점으로 근대화는 점차적으로 정착되어갔으며, 한편에서는 한국 사회의 내재적 사정을 반영한 측면을 중시하였고 그것은 민족적 자각의 발로가 되어 민족주의가 발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문화의 유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힘입어 ‘신무용’이 ‘예술’로 인정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전통시대의 춤을 ‘비예술(非藝術)’로 기녀나 무당이나 민간인들이 추는 낡고 촌스런 문화로 무시하는 경향도 팽배하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의식이 깨어나 최남선, 손진태, 송석하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민족자각 의식을 일깨우는 노력을 하였고, 신무용에 대응하는 전통춤을 발굴하고 무대화하는 노력도 미약하나 발현되기도 하였다. 1902년 협률사와 1907년 광무대 등에서 재인청출신 김인호와 뒤를 이은 한성준 등이 전통춤의 무대화를 위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지도하여 무대에 지속적으로 올리고 정립하였다. ③ 사제전승의 도제식(徒弟式) 전수교육의 문제-원형전수와 폐쇄적 교육 한국의 전통적 교육방식은 도제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예능분야 역시 스승의 독창적 비법을 전수받아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똑똑한 제자들은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기개발을 통해 더욱 문화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나갔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원형전수’라는 미명하에 스승의 기법을 한 치라도 변화시키면 위법이라고 하여 문화의 발전지체 현상 속에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매방 승무와 살풀이춤을 순서 하나라도 틀리면 큰 죄를 짓는 국가문화적 구조 속에 살고 있다. ④ 새로운 전통문화 창조와 발전 문제 –창조적 계승의 원천봉쇄 해방 후에는 더 개방적이어서 미국과 유럽등지에서 외래문화가 직수입되어 이전보다 수용과 대응문제에서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아 왔다.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법률 제961호)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문화재보호법에 안주하여 특혜를 누리면서 지내왔지만 지정되지 못한 수많은 전통춤들은 반대로 더 소외되고 인멸되는 비극을 잉태하였다. 게다가 ‘원형보존’이라는 무형문화재법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어 일방적 전수만이 지속되면서 조선시대에 머물러 있다. 변화해가는 현대문화와 세계화에 더욱더 멀어지고 대한민국시대의 전통춤을 창조해내지 못하는 편식과 전통문화적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다. 2) 제도적 관점에서 본 문제점 ① 무형문화재 제도 지정당시의 문제-전통문화의 소멸위기-국가관리 전통문화의 위급상황이 되니 극약처방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게 되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을 무형문화재 춤종목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보호아래 보존 전승하게 되었다. 결국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 국제정세의 서세동점(西勢東占)과 근현대화로 인한 ‘전통문화유산의 소멸위기’를 극복하려는 시급성 때문이었다. ② 무형문화재 제도 현재의 문제-‘원형’보존의 박제화-‘전형’ 개념도입현재는 ‘문화원형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상 전승과 평가의 기준이 되는 ‘문화원형 실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이다. 원형(原形)과 원형(原型)은 있긴 있으나 고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문화의 속성은 원형질(原形質)은 있으나 형태(形態)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무형(無形)문화재인 것이다. 문화원형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해마다 변화된 형태를 남기면서 ‘성장(成長)하는 생명체(生命體)’와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있으나 고정된 형태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소한의 ‘시형(時形) 또는 시형(時型)’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지 50여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사라져가는 전통문화의 보존전승이라는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비지정문화재의 무관심과 소외현상도 심화되는 역기능도 나타나고 있으며, 지정종목도 ‘원형전승’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퇴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어서 2015년 다시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원형(原形)’논리에서 ‘전형(典型)’으로 그동안 지나치게 박제화 되었던 무형문화재의 발전변모의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유네스코 무형유산 운영기준과 연계한 법안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근본적으로 전통시대의 문화 변동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슨하고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러한 정적인 문화환경에 살아온 한국인은 근대 서구문명의 범람과 현대화 과정에서 동적인 문화변동에 대처능력도 미흡했고, 보수적인 시각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도제식으로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으로 전수받아온 장인정신은 변화를 부정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수동적인 전승에 안주하여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일각의 전승 성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4. 전통춤의 미래 발전 방향 1) 전통춤에 대한 문화론적 발전 방향① 문화에 대한 3대 시각인 '총체론적 시각(holistic perspective)',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 ,'비교론적 시각(comparative perspective)'을 견지해야 한다. 특히 '상대론적 시각(relative perspective)'으로 1000여종에 이르는 비지정 춤에 대한 관심과 전승에 지정춤과 동격으로 전승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화, 무대화, 전승력을 키워야 한다. ② 문화의 5대 특성인 학습성(후천성), 공유성, 축적성, 변동성(다양성), 전체성(통합성) 등의 입장에서 발전시킨다. 특히 변동성(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이제는 ‘원형’보다는 ‘전형’의 개념으로 발전적인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전형개념에는 ‘원형’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최초 전수 당시의 춤을 기본으로 간직하며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발전적인 노역을 경주하는 이중적이고 양면적 전승이 필요하다. 이것이 또한 축적성이며 역사성이 되어간다. 2) 전통춤에 대한 원론적 발전 방향 ① 삼원적(三元的) 전승방향 국제로 시야를 넓혀 한국과 가까이는 한중일, 그리고 세계라는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삼원적(三元的)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한국의 전통춤을 원형대로 지켜나가는 일(원형적 전승), 전통춤을 현시대에 맞게 발전시켜나가는 일(발전적 전승), 세계가 하나로 집약되고 가까워지는 현대사회에 세계춤과 함께할 수 있는 예술춤을 창조해 나가는 일(창조적 전승)이다. ② 세계화 방향 지금까지 전통문화는 「토착화」에 주력했다면 이후는 세계적인 「보편화」가 과제이다. 소멸되던 전통춤은 일차적으로 한국화(韓國化)작업이었다. 글로벌시대에는 세계화가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다. 주체성이 ‘국내적’(한국문화, 한국춤)이라면 세계성은 ‘국제적’(국제문화, 국제춤)이다. 주체성이 자기를 지키는 ‘보수’라면 세계성은 자문화와는 별개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이다. 또 문화논리로 보면 주체성은 ‘전통성, 수구성, 독창성’이고 세계성은 ‘외래성, 통합성, 전파성’에 비유된다. 즉 주체성(국내문화)과 세계성(국제문화)을 풀어가기 위해서는 두 명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상반관계’가 아니라 ‘상호관계’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문화수입이 문화수출보다 비중이 더 컸다. 그러나 문화예술의 국제경쟁력 측면에서 보면 여태 밑지며 살아왔다.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만 급급했지 우리문화를 세계시장에 내세우는 노력은 미흡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한류문화, K-culture’(K-pop, 한국음식, 화장품, 드라마 등)가 세계무대에 전파되기 시작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전통춤이 국내적으로 스포츠댄스, 힙합 등에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는 일과 더불어 ‘한류춤, K-dance’로서 세계무대로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 ③ 대한민국시대 신전통춤의 창조 노력 5천년의 한국 문화사에서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도자기문화를 살펴보면 선사시대 토기에서 고려시대 상감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기로 창조하여 찬란한 전통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전통춤도 시대별로 다양한 춤들이 창조되고 전승되었다. 근세말 효명세자는 20종의 궁중춤을 창조했다. 김인호와 한성준은 100여종의 전통춤을 정립하여 전승시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국무용가들은 대한민국시대 전통춤을 창조 또는 재창조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시대나 근대의 과거춤에 매달려 미래춤을 창조하는데 소홀히 했다. 우리보다 북한은 전통춤은 무시했지만 민족적인 색채를 띤 새로운 민속춤을 부단히 창출했다. 물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가 전통고수에 매달리는 동안 북한은 재창조에 매달렸다.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신전통춤, 재창조춤 등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백봉 부채춤은 세계무대에서는 한국민속춤으로 이미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통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신전통춤들이 쏟아져 나와야 미래국가시대가 도래했을 때 대한민국시대에 찬란한 전통춤들이 창조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문화(춤)는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력(전승력)을 지니고 진화하며 오랜 동안 전승하게 되는데 문화의 속성에서 벗어나면 소멸된다.”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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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명무 "마지막 궁중무희 정소산"정소산(1904~1978)은 궁중무희 마지막 세대로, 대구 근대한국무용사에서 대구 전통무용의 기반을 다졌다. 1904년 대구 중구 동성로3가 12에서 정사윤과 박난파의 13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난파는 한때 약방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소산의 소질을 일찌 발견하고 5세였던 정소산을 당시 명무였던 채희로부터 처음 춤을 배우게 했다. 6세쯤에는 대구시 기생조합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부산의 봉래권번, 수원의 화인청에서 머물다가 17세에는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19세 때는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하규일에게 본격적으로 법무를 익힌다. 23세 때는 한성준으로부터 승무를 사사한다. 그후 정소산은 조선권번, 달성권번 등 권번에서 춤을 지도하고, 숙명여고 무용교사를 지냈다. 1967년 정소산은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궁중무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정소산’이라는 이름 석자가 널리 알려졌지만 무슨 연유인지 심사에서 탈락했다. 한평생 전통춤 외길을 걸어오며 우리 예술의 전승과 보존에 힘써 왔다. 비록 자신은 문화재가 되지 못했지만 제자 백년욱이 ‘정소산류 대구흥춤’으로 2015년 대구시무형문화재 제18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살풀이춤으로 불리는 이 춤사위는 전통춤의 특징인 정중동(靜中動)·동중정(動中靜)의 미가 극치를 이루는 춤이다. "1900년대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 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증인이다." 이병옥 용인대 명예교수(춤비평가)의 ‘근대 전반기 대구지역 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논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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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역춤의 개념과 형성 배경 (종합)지역춤이란 특정 지역의 생태문화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공통적 특징을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춤을 말한다. 지역춤은 지역의 기후풍토와 사회환경에 따라 민족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역마다 춤사위 형태나 내용이 다르게 파생된다. 예를 들면 추운 지역과 더운 지역의 춤이 다르고, 산악지대와 평야지대의 춤이 다르고, 유목민들의 춤과 농경민들의 춤이 다르다. 또 세시풍속과 시대, 향유자의 사회신분과 종교에 따라서도 춤이 달라지고, 반주음악이나 의상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전통춤의 문화권은 대체로 영남권, 호남권, 충청권, 강원권, 수도권, 이북권 등으로 나누어진다. 자연풍토적 배경과 지역춤의 상관성 추운 지역은 수직춤과 도약(跳躍)춤, 더운 지역은 수평춤과 답지(踏地)춤 추운 지역은 추위를 극복하기 위해 도약하는 수직춤과 강렬한 춤을 춘다. 수직춤이란 발과 다리를 많이 사용하여 무릎 굴신이 많고 온몸을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도약(跳躍)춤이다. 북방민족인 몽골의 기마민족춤, 러시아 코사크 댄스(Cossack Dance)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 북부지역의 춤은 일반적으로 남부지역춤에 비해 강렬하고 도약이 많은 특징을 보이는데 해서지방 탈춤과 무당춤, 북한민속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더운 지역에서는 뛰는 춤을 추면 금방 더위와 땀으로 범벅이 되기 때문에 온몸으로 뛰지 않고 에너지 소비를 줄여 부드럽게 손과 발만 추는 말초부위춤을 추거나 엉덩이만을 좌우로 흔드는 수평춤을 춘다. 수평춤은 몸통 사용을 억제하고 손을 주로 사용하거나 제자리에서 엉덩이를 흔들거나 걸어다니며 추는 평면적인 답지(踏地)춤이다. 동남아시아 태국과 인도 등 남방민족의 말초부위만 움직이는 눈춤과 손가락춤, 폴리네시아의 허리춤과 하와이 훌라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의 남부지역의 춤은 북부에 비해 부드럽고 도약이 적고 땅을 밟는 답지춤이 많은 특징을 보여주는데 산대탈춤, 남부무당춤, 강강술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아프리카 열대지역도 더운 곳인데 마사이족이 도약춤(Jumping dance)을 왜 출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이들은 대평원의 수렵생활로 맹수의 위협에 대한 사전방지와 사냥감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높이 뛰어 먼 곳을 확인해야 하는 삶의 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평원의 춤은 수렵이라는 생업의 방식으로 인해 춤의 생성요인이 다른 배경에 놓여있다. 산악지대는 천상지향춤, 평야지대는 대지지향춤 산악지대의 경우는 이동하기도 불편하고 숲과 나무 등 주변의 공간적 장애로 움직임이 제한적이어서 보이는 태양과 하늘을 향해 춤을 추는 천상지향춤, 상향춤이 주로 나타난다. 또한 좁은 공간 때문에 팔과 손도 옆으로 펼치기보다는 위를 향한 발산적인 춤을 추며 고도가 높아 추운 지역의 춤들과 유사성을 보인다. 티베트의 장삼자락춤, 멕시코 아즈텍의 태양신춤, 한국의 백두대간을 따라 존재하는 함경도 돈돌라리춤과 애원성춤 등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평야지대는 드넓은 지역이라 춤 종류도 다양하고 땅에서 일용한 양식이 창출되기에 대지에 고마움을 가지고 몸을 낮춰 추는 대지지향춤, 하향춤, 흥겨운 춤, 손과 팔을 옆으로 마음껏 펼치며 부드러운 예능성이 높은 춤이 발달한다. 평야지대는 대체로 따뜻한 지역이 많아 더운 지역의 춤과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평야지대는 대부분의 농경지로 농업을 영위하면서 풍농을 기원하고 추수를 감사하는 농경춤이 발달하고 있다. 농경민족은 손춤, 유목민족은 발춤 흔히 유럽춤은 발레처럼 발춤을 주로 추는데 한국춤이나 아시아춤은 발보다 손춤을 주로 추는가? 라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문화현상에 대한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농경생활이 주업인 한국과 아시아인들은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기 위해 파종부터 김매기와 추수까지 모두 손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 춤의 중요한 기원 중 하나가 바로 먹거리를 찾아야하는 생업을 모방하는 유형이다. 예를 들면 원시시대의 수렵춤과 채취춤으로부터 유목춤과 농경춤이 이어져 왔는데, 이것은 풍요를 기원함과 동시에 생업의 몸짓을 표현으로 옮긴 모방춤들이다. 농경활동은 주로 허리를 굽히거나 몸을 낮춰 손으로 하는 농사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발춤보다는 농경을 모방한 손춤이 더 발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아시아 농경춤들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유목은 많은 가축을 이끌고 초원을 찾아 걷거나 뛰어다니는 이동생활이 근간이기에 유럽 유목민들의 춤은 손춤보다 월등히 발춤이 발달하고 있다. 서양 발레나 아일랜드의 탭댄스(Tap Dance)가 발춤 중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따라서 생업적 요인으로 볼 때 농업이 주업인 아시아춤은 손춤, 유목이 주업인 유럽춤은 발춤이 발달하게 된 이유이다. 사회환경적 배경으로 형성된 지역춤 앞서 밝힌 자연풍토적 배경들인 온난의 기후적 요인, 산간과 평야 등 지리적 요인, 농업과 유목 등 생업적 요인이 지역춤 형성의 초석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는 사회환경적 배경인 세시풍속적 요인, 역사적 요인, 사회적 요인이 지역춤의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세시풍속(歲時風俗)이란 일상생활에서 계절에 맞추어 관습적으로 되풀이하는 민속을 말한다. 지역에서 행해지는 축제, 카니발, 명절, 추수감사제 등에서 연행하는 지역춤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서는 정월 대보름 농악춤과 무동춤, 단오절의 탈춤, 백중절의 허튼춤, 추석절의 강강술래 등 다양한 민속춤들이 지역마다 전승된다. 역사적 요인으로 고대춤, 중세춤, 근대춤 등 시대변천에 따라 다양한 춤들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전승되었다. 동시대라 할지라도 한국의 역사에서 보면 상고시대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 동맹(東盟) 등이 있었고,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 백제의 기악(伎樂), 신라의 사자춤, 처용무 등 각기 다른 지역춤들이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요인이 되는 신분, 행정구역, 교류관계로 인해 지역춤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신분과 관련한 춤으로는 궁정(궁중)춤과 민속춤, 귀족(양반)춤과 서민(농민)춤, 기방춤과 재인춤 등이 있다. 여기서 궁중춤은 지배자(왕, 황제)가 통치할 때 쓰이는 춤으로 단일하기 때문에 지역 유파(流派)가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행정구역은 지역춤의 권역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지역춤의 유파가 확실하게 나타나게 되는 특성이 있다. 예로부터 ‘조선팔도’라는 말은 한국을 8도로 구분한 것인데 이것은 곧 8도의 지역춤이 제각기 형성되어 있다는 뜻과도 같다. 교류관계란 전파문화인지 창조문화인지를 파악하는 관계를 뜻한다. 우수한 문화는 주변지역으로 전파되는 특성이 있다. 반대로 특정지역에서 창조된 문화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이 있다는 특성도 있다. 이러한 이중적 성향의 비중에 따라 전파지역인지 독창지역인지가 나타나는 원리를 가진다. 즉 전파한 유사성보다 창조한 독창성이 많을 때 타 지역과 차별이 나타나고 지역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농악춤은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악기연주자는 연주만하고 연희자는 춤만 추는 것이 기본원리인데, 한국의 농악춤은 타악연주자 모두가 연주하면서 집단춤을 추고 게다가 상모돌리기까지 하는 연행형태를 띠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민족문화적 배경으로 형성된 지역춤 지역춤을 형성하는 민족문화적 배경은 종교의식과 반주음악, 춤의상 등의 요인을 들 수 있다. 종교는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지역에서 민족의 사상 감정과 윤리 도덕의 기반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연히 춤문화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종교의식은 춤의 요소가 많은 무교(巫敎),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수니파) 등도 있지만, 춤의식을 거부하는 기독교일지라도 지역춤의 성격이나 장르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무속의식은 소리와 춤과 공수내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의식도 영산재, 수륙제 등에서 범패와 작법춤으로 진행하며, 힌두교도 가락과 춤으로 푸자(puja)의식을 거행하며, 이슬람교 수니파의 의식춤으로는 터키 세마(Sema)춤과 이집트 탄누라(Tanoura) 등 선회(旋回)춤이 유명하다. 춤은 무반주로도 추지만 대부분 음악반주에 맞춰 춘다. 따라서 악기, 선율, 리듬, 노래 등의 음악적 상관관계가 클 수밖에 없다. 나라마다 다양한 민족악기와 민요와 장단 등에 맞추어 민족정서가 담긴 춤이 형성되고 전승되므로 음악반주의 영향력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역춤은 지역민들의 의식주와 관련성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지역민들의 종족의상을 입고 추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무복의 맵시와 소품들에 의해 춤의 성향과 춤사위가 형성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밖에도 통과의례의 요인으로 출산의례춤, 성년의례춤, 혼례춤, 장례춤이 있으나 문명화됨에 따라 의례만 남고 춤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결론적으로 지역춤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역춤은 자연풍토적 배경으로 ‘뿌리’를 내리면 사회환경적 배경으로 ‘줄기’를 이루고 민족문화적 배경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이병옥 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 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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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국의 지역춤, 전북지역춤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부산·경남지역춤과 광주·전남지역춤에서는 기후와 지리 등 생태환경적 차이로 형성된 춤 전승과 특징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다. 그러나 대구·경북과 전북 등 북도지역은 남도지역보다 인구·경제·사회환경면에서 현재는 약세지만, 조선시대에는 영호남의 거점지역으로 정치·문화면에서는 중심지였다. 경상감영(대구)과 전라감영(전주)에는 관찰사(觀察使, 監司)를 비롯한 벼슬아치(官員)와 관속(官屬, 아전과 하인), 그리고 지방 호족(豪族)들이 많아 매우 보수적이지만 이들은 문화예술의 향유층이었기에 자연히 문화예술 종사자도 많아져 교방(敎坊)의 관기(官妓)와 사기(私妓), 장악청(掌樂廳)의 악공(樂工)과 재인(才人), 광대(廣大)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도지역은 저명한 춤꾼과 소리꾼들도 많았으며 전승 뿌리도 깊었다. 그래서 지난 대구·경북지역춤에서는 경상감영의 춤 전승배경을 바탕으로 배출한 많은 근현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였던 것이다. 전북지역춤 역시 전라감영의 역사문화적 인프라와 예술환경의 영향으로 배출하게 된 많은 춤 인물에 비중을 두어 연재하고자 한다. 전북출신으로 중앙(서울)무대에서도 유명한 한국발레의 대부 임성남, 한국 현대무용의 대모 육완순, 한국춤극의 대가 국수호, 승무의 명무 채상묵 등 장르별 대가들이 많은 배경도 살펴본다. 또한 전북지역 전통춤의 계통별 특성과 전승자들의 계보와 전승내용을 살피고, 전북 전통춤의 대부 최선(최정철)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5명의 인간문화재 춤 제자를 배출한 전승배경도 관심있게 살펴본다. 아울러 민간춤에서 농악분야는 많이 지정된 반면, 탈춤분야는 한 종목도 지정되지 못한 연유도 알아본다.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교방춤 전승 전북지역은 마한시대와 백제를 거쳐 통일신라기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을 꽃피운 이성계(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의 21세손)의 어진(御眞)과 조선왕조실록이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다. 그래서 전주를 ‘천년의 고도’, ‘조선왕조의 발상지’라 부른다. 조선 초기 전주에 설치된 전라감영(全羅監營, 전북기념물 제107호)은 1896년까지 전라남·북도를 포함하여 제주도까지 통할하는 관청으로 성곽에 둘러싸인 전주부 내에 있었으며, 전주 관아(官衙)가 반대편에 있었다. 전주부(全州府)·광주목(光州牧)·순창군(淳昌郡)·순천좌수영(順天左水營)·무주부(茂朱府)·제주목(濟州牧)에 각각 교방(敎坊)이 설치되었었다.<『호남읍지』(1895)> 전주부는 교방과 장악청(掌樂廳), 광주목은 교방과 교방청, 순창군은 교방, 순천 좌수영은 기생청, 무주부는 교방청, 제주목은 장춘원으로 명칭을 달리 지칭하였다. 무주부 교방에서는 <포구락>·<고무>·<선유락>·<검무>·<승무>·<헌선도>등 6종의 춤과 이에 수반된 반주, 그리고 소품목록이 보존되어 상당히 큰 규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무였던 <포구락>·<선유락> 등이 지방 교방에서도 연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궁중무용과 지역 간의 교섭양상을 뚜렷하게 살필 수 있었다.<『호남읍지』(1895년), 『茂朱府邑誌』> 일제 강점기 권번조직과 전승춤 전북지역에 조선후기까지 전주·무주·순창·남원(남원은 기생 기록만 있음)에 설치하였던 ‘교방’(敎坊: 조선시대 여기(女妓)를 관장한 기관)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전주와 남원에만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의 일본식 명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남원지역에 교방설치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기생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교방이 존재하지 않았던 군산·정읍·이리(익산)·부안지역에 권번과 예기조합이 새롭게 설립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근대시기 경제력 약화와 교통망 부족으로 말미암아 무주·순창에서 교방이 사라지게 되었고, 반면에 일제강점기 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한 군산, 그리고 호남선과 전라선의 역이 개설되면서 은행이 설립되는 등 경제형 도시로 탈바꿈한 익산과 정읍에 예기조합 내지 권번이 설치되었다. 1916년의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3호<요리옥·음식점 영업취체규칙>(식품위생법)에서 예기(藝妓:가무, 서화, 시문 등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작부(酌婦: 술접대부)·예기치옥(藝妓置屋: 예기들의 거처사옥) 등 요릿집 위생관련 법안규칙에서 기녀들을 명시한 법령이 나타난다. 당시 전주에는 1915년에 예기조합(藝妓組合), 1923년에 전주권번이 설립되었고, 군산에서는 1923년에 군산 예기치옥(藝妓置屋), 남원은 1926년 예기조합과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정읍은 1928년 예기조합, 이리(익산)는 1929년 기생조합, 1939년 예기조합이란 명칭으로 각각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조선미인보감』 기록을 보면 1923년 당시 전주권번의 기생 규모는 최소 50명은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북 출신으로 서울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녀들은 한성권번에 조추월(曹秋月)과 조산월(曹山月), 신취옥(申翠玉) 등이 있었으며, 한남권번에는 장옥주(張玉珠), 송경주(宋瓊珠), 조산옥(趙珊玉)이 활동하였다. 전북 출신의 기생들은 고향에서 기예능을 익힌 후 경성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궁중춤(呈才)보다 <승무>·<살풀이춤>·<입춤>·<검무>·<화관무> 등의 민속춤을 주로 추었다. 교방(권번)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전북지역의 전통춤은 교방계통춤과 재인계통춤, 두 계통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전승되고 있다. 교방계통춤이란 교방·권번·기방 등에 소속되어 추던 기녀들의 춤으로 곱고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는 여성 성향의 춤을 말하며, 반면에 재인계통춤이란 재인·광대들에 의해 추던 춤으로 투박하고 담백하지만 고고하고 품격있는 남성 성향의 춤을 말한다. 하지만 남성이라 할지라도 교방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곱게 추는 경향이 있고, 여성일지라도 재인계춤을 전승한 춤꾼들은 담백하게 춤을 춘다. 예를 들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였던 이매방(27호 승무· 97호 살풀이춤)은 어린 시절 목포권번장 함국향으로부터 권번춤을 체득하였기에 곱디 고운 교방계통춤으로 전승하였으나, 반대로 한영숙(국가 27호 승무 보유자)은 처음부터 재인 한성준으로부터 춤을 배웠기에 담백한 재인계통춤의 성향을 보였다. 전북지역의 교방계춤은 여러 지역 권번의 명무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신분적 차별대우로 대를 잇지 못했으나 전주 전동권번의 이추월, 남원 권번의 조갑녀, 군산권번의 장금도만이 어렵게 춤맥을 잇고 있다. 전주전동권번의 이추월의 춤을 최선(호남살풀이춤, 전북15호)이 오롯이 이어받아 전북 교방계춤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최선(본명 최정철, 1935~)의 문하생으로 성장한 제자들이 각기 다른 종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분화 발전하였다. 최선의 제자들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된 이들은 김광숙(예기무, 전북48호), 이길주(호남산조춤, 전북47호), 고선아(한량무, 서울45호), 김나연(화관무, 황해 4호), 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 등 5명이나 되며, 채상묵(전통춤협회이사장)을 비롯하여 장인숙(호남살풀이춤보존회장), 허순선(광주대 교수), 정은혜(충남대 교수), 김희숙(영남대 교수)들이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많은 제자 보유자, 대학교수, 명무들을 양성한 최선은 금년(2018)에 전주와 서울에서 제자들과 함께하는 자랑스런 <사제일심(師弟一心)>춤판을 가졌다. 원광대 명예교수인 이길주(전북47호, 호남산조춤)는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에 입문하여 전북최초로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여 전북지역 대학무용발전에도 공로가 크며, 호남산조춤은 이추월-최선-이길주로 이어지는 교방계춤으로 산조연주에 맞춰 멋진 춤사위를 발휘하는 한국 전통춤의 대표적 특성인 한과 신명을 한층 더 자유롭게 승화시켰다. 김광숙의 예기무(전북 48호)는 부채춤-수건춤-접시춤이 복합된 교방춤으로 어린 시절 최선의 문하생을 거처 정형인, 박금슬에게서도 춤을 사사받았다. 고선아 역시 최선의 문하생으로 상경하여 강선영 태평무을 이수하고 경기지역 4인 군무인 한량무 보유자(색시춤, 서울 45호)가 되었다. 김나연도 최선류 호남살풀이춤 이수자로 화관무 보유자(황해 4호)가 되었다. 그밖에도 남원권번의 조갑녀의 춤은 딸 정명희로 이어지고 있으며, 군산권번 장금도의 춤은 송미숙(진주교대)과 신명숙(대진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재인계통춤의 전승과 무형문화재 지정 현황 한편 전북지역 재인계춤의 대부는 정읍출신 정자선(1872~1949)을 꼽게 되는데, 소리와 기악은 물론 춤도 뛰어났으며, 그의 전주 제자로는 김소란·정형인·박금슬·김유앵·장월중선 등이 뒤를 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제자이며 장남인 정형인(1896~1973)의 뒤를 이은 제자들은 금파 김조균(1940~1998, 한량무, 전북 17호)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국수호(전 국립무용단장)와 농악명인 정인삼(소고춤, 경기56호)도 있다. 금파(김조균)를 중심으로 대를 이은 국수호·고선아·김숙·김무철(한량무, 전북44호)를 비롯한 노현택(무용협회 전주지부장)·문정근(전라삼현승무, 전북52호)·심가영와 심가희(삼례문화예술촌 대표)·김애미·이정노·정길만(국립무용단원 훈련장) 등이 있다. 전북지역의 재인계춤은 정자선-정형인-김조균(금파)으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조균(금파)는 한량무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으나 일찍 작고(1940~1998)하는 바람에 전승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들 김무철이 부친의 춤 불씨를 살려 다시 한량춤(전북 44호)으로 인정받았다. 정자선-정형인-박금슬-문정근으로 이어지는 전라삼현승무(전북52호, 문정근)도 전북의 재인계춤의 또 다른 큰 줄기를 계승하고 있다. 정읍의 전계문(全桂文,1872~1940, 정읍예기조합)은 춤 분야도 뛰어났던 것으로 전한다. "전계문은 당숙인 전도성(全道成,1864~?)의 수행 고수로 활동한 인물이다. 전계문은 북뿐만 아니라, 춤과 정악·양금·가야금·거문고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했는데 특히 <한량무>가 일품이었다. 한성준(1874~1941)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정읍에 내려가 보름 정도 머물며 전계문에게 북가락과 춤사위를 배웠다.”는 사실은 이보형(음악민속학자)이 송영주(유명 고수였던 태인 출신)를 대담한 결과 근대 전통춤의 대가 한성준이 전계문에게 태인(泰仁)으로 내려와 배운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다.<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판소리유파』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16)(서울: 문화재관리국, 1992), 119쪽> 또 하나의 특별한 재인계춤은 정읍의 전계문으로부터 한성준을 거치고 멀리 서울의 김보남을 거쳐 다시 정읍으로 돌아온 신관철로 계승한 수건춤(전북59호, 보유자 신관철)이다. 오늘날 살풀이춤은 1930년대 초 한성준이 정읍의 전계문을 찾아가 춤을 배울 때 수건춤을 살풀이장단에 추는 것을 보고 제1회 한성준 춤발표회에서 처음으로 ‘살풀이춤’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보편화된 명칭이었다. 이후 수건춤이란 명칭이 사리지는 듯하다가 최근 원래 명칭인 ‘수건춤’을 찾아 쓰는 경향으로 지정된 것이다. 익산시의 한국춤 분야는 원광대 무용학과 이길주 교수의 제자로 고명구(무용협회 익산시 지부장), 김명신(전통춤협회 익산시 지부장), 이한녀, 장태연, 장미나(국악원 무용단) 등이 활동 중이며, 익산의 최태열(마한백제무용단 단장, 전북 고부출신 은방초 사사)은 무용교육자 겸 무용가로 ‘길거리 캐스팅’처럼 어린 유망주들을 발굴 육성한 중견남성무용가들로는 이강룡(전 대전시립 지도위원), 박종필(익신시립 무용단 예술감독), 노수은(전 김포예총 회장), 조남규(상명대 교수, 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진원(서울시립 무용단), 홍기태(부산시립 수석안무자), 박근식(무용학원운영), 소병구(행안부 지방자치 인재개발원 교수, 전통문화), 김지립(무용학원운영) 등이 있으며, 여제자 이미숙(의정부시무용단 예술감독)도 의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군산시에는 육정림의 제자 김덕림, 송미숙(진주교대 교수), 김정숙(군산시 지부장), 이한녀( 전국립국악원 무용단) 등이 있으며, 이운태 군산여고 교사로부터 최은정(태평무 호남 지부장)이 사사받아 군산에서 활동하면서 강선영 태평무를 이수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인물로 본 한국무용사』(예론사, 1992)를 출간한 전주출신 오화진은 아시아 무용협회를 운영했다. 전북의 창작춤과 발레 전승 전북의 현대춤과 발레는 이시이바쿠(石井漠, 1887~1962)와 최승희(1911~1967)의 제자인 김미화(본명 김옥순, 1922~1984)가 전라북도의 ‘창작춤의 효시’라고 본다. 최선(호남살풀이춤 보유자)도 어린 시절 김미화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최승희와 김미화에게 사사받은 육정림(1928~1986)이 군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마찬가지로 최상철(중앙대 교수)도 군산출신 현대춤 교육자이다. 한국발레계의 대부 임성남(1929∼2002, 초대 국립발레단 단장)은 전주사범학교 시절 한동인 발레단 공연을 보고 제자가 되어 발레를 시작하여 일본유학에서 핫도리 시마다(전북 익산출신 제일교포)에게서 발레를 배워 서울에서 활동하였고, 군산출신 김긍수(중앙대 교수, 전 국립발레단장)도 발레 전공자이다. 전주출신 김양곤(서울교대 교수)은 1956년 한국교육무용가협회를 결성하여 파조, 박외선, 정혜옥 등과 함께 활동(1957년 대표최고위원)하면서 서울교대 무용교수로 교육(초등무용)에 공헌하였으며, 제자에는 육완순(전 이화여대 교수, 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이병옥(용인대 명예교수, 춤비평, 이론은 정병호 교수 사사)이 있다. 미국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온 조원경(전북김제 출신, 1929~2005)도 발레와 창작춤 전공으로 『무용예술』(해문사, 1967) 저서를 발간했었다. 한국현대춤의 거목인 육완순(1933~)도 김미화에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무용의 꿈을 키워 이화여대 교수로 현대춤계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전주성심여고 무용교사였던 박순자(부산대)로부터 이혜희(전북대, 발레), 손정자(우석대, 발레)가 대를 잇고 있다. 그밖에도 권오희에서 양정수(수원대)로 현대춤이 이어지고 있다. 무형문화재 연희춤-탈춤은 없고 농악만 발달 춤과 관련한 연희종목은 탈춤과 농악춤이다. 그런데 영남지역에 비해 호남지역은 탈춤종목은 한 종목도 전승하지 못해 지정된 종목도 없다. 이유는 풍농기원의 마을축제가 농악과 탈춤이 함께 발원하여 전승하는 과정에서 분화발전하게 되었는데, 호남지역은 농악이 발달하다보니 탈춤은 농악의 잡색놀이(양반, 중, 포수, 창부 등)로 예속되어 전승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농악은 전라북도 내륙과 산악지대의 호남 좌도농악(필봉, 남원)과 해안과 평야지대의 우도농악(정읍, 부안, 김제, 고창)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보이며 분화 발전하였다. 호남좌도농악은 고깔보다 전립을 쓴 채상소고춤이 눈에 띄며,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채상모, 부포상모)가 발달하였으며 판굿중심의 진풀이가 발달하였다. 호남우도농악은 외관상 고깔소고춤이 눈에 띄며, 악기별 개인놀이(쇠춤, 장고춤, 소고춤)가 발달하였다. 내용에서도 장구가락과 설장고춤이 발달하였고, 윗놀이(상모춤)보다 밑놀이(악기가락춤) 발달하였다. 전북 좌도농악의 대표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임실필봉농악(국가11-5호, 보유자 양진성)은 쇠잡이(꽹과리, 징)만 상모(털이나 줄이 달린 모자)를 쓰며 나머지는 고깔을 쓴다. 농악의 종류에는 섣달 그믐의 매굿, 정초의 마당밟기, 당산제굿, 보름굿과 징검다리에서 치는 노디굿, 걸궁굿, 문굿, 농사철의 두레굿, 기굿과 판굿이 있다. 남원농악(전북7-4호, 상쇠보유자 류명철)은 전북 남동부의 좌도농악을 대표하며 가락이 다채롭고 놀이동작이 세련되고 섬세하며, 농악대원들은 꼭지에 흰 새털이나 종이 오리를 꾸며 돌리는 상모가 특징이다. 전북우도의 부안농악(7-1호, 상쇠보유자 라모녀(금추), 며칠 전에 작고)은 음악·춤사위·놀이가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으며, 생동감 넘치는 가락이 많다. 정읍농악(전북7-2호, 소고보유자 김종수, 유지화)은 세습무 집단의 뛰어난 예능과 접합되어 예술적 수준이 높다. 김제농악(전북7-3호, 상쇠 이준용, 박판열)은 평야지역의 두레굿과 마을 대동굿의 형태로 농악을 전승해 오다가 좀더 전문적인 예인집단에 의해 발달되어 있다. 고창농악(전북7-6호, 설장고 정기환, 소고 정창환)은 예로부터 고창, 무장, 영광 등지의 해변을 끼고 형성된 농악으로 잡색놀음과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전북 지역에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연유 전북지역은 현재 국내에서 대도시(광역시)도 없고 인구도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춤, 현대춤, 발레 등 여러 장르에 걸쳐 굴지의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된 배경을 짚어본다. 첫째, 조선시대 전주교방을 비롯하여 무주교방, 순창교방, 남원에는 수많은 관기와 악공들과 풍류객들이 존재했던 곳으로 지역춤과 소리문화의 인프라가 오랜 역사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호남과 제주를 아우르는 정치·문화·예술의 중심지인 전라감영(全羅監營)과 전주부(全州府)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전주시내 초입에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라는 일주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 전북지역은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로 조선시대 국내 최고의 예술가들이 운집하던 고장이었다. 조선봉건사회에서는 예능인들을 천시했지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받은 명창명인들은 어전명창의 명예를 얻었고, 벼슬을 제수 받는 경우도 있었기에 예술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분상승의 명예로운 삶으로 생각하는 문화적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 전주 지방에서 거행된 예능경연대회(藝能競演大會)로 본래는 숙종(1674~1720) 때 전주에서 거행된 궁술대회(弓術大會), 영조(1724~1776) 때 전주 특유의 통인물(通引物)놀이, 그리고 철종(1849~1863) 이후 국내 최초로 경창(競唱)된 판소리 백일장 등 민속무예(民俗武藝)놀이의 총칭이었다. 순조(1800~1834) 때에는 대사습놀이에서 장원한 우수 광대에게 가자(嘉資)와 명창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한 동안 이 놀이는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다시 복원되어 판소리·농악·무용·시조·궁도 등 5개 부문의 경연으로 시작하였고 오늘날에는 판소리·기악·민요·시조·전통무용·농악부문으로 경연이 정착되었다.<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셋째, 농악의 발달은 남성춤 전공자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우도농악은 설장고춤, 상쇠춤, 소고춤 등 개인놀이가 발달하여 농악전공자들이 춤전공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주농고 농악단 출신의 국수호, 손병우(우석대 교수)를 비롯하여 정인삼(전 민속촌 농악단장, 소고춤보유자) 등 많은 남성무용가들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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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의 지역춤, 광주·전남지역춤지역춤이란 특정지역의 생태문화적 배경 속에서 지역민들에 의해 공통적 특징을 형성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춤을 말한다, 한국의 전통춤은 지역마다 색다른 지역춤들이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지역춤을 형성하게 된 생태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전국을 영남과 호남, 강원과 충청, 수도권과 북한 지역춤 등으로 나누어 대표적인 춤 종목과 특징을 연재한다. 기후와 지리환경에 따라 발달한 농경민속춤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국토 구조로 인해 위도에 따라 기후환경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남부지역은 북부지역에 비해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로, 삶이 여유롭고 느긋하여 속도가 빠른 춤이나 도약하는 춤보다는 느리지만 멋스러운 민간춤이 발달하였다. 지리적으로 평야지역은 풍농으로 인한 풍요롭고 흥겨운 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교통이 발달하여 문화의 교류가 빈번하고 전파력이 좋아 춤의 종류도 다양하다. 평야지대로 갈수록 폭넓게 움직이는 ‘수평춤’이 많고, 산악지대는 ‘수직춤’이 많다. 수직춤이 발로 뛰어오르는 도약과 무릎 굴신이 특징이라면 수평춤은 발의 옮김과 손을 넓게 펴들고 추는 춤사위가 특징이다. 광주·전남지역은 따뜻한 남쪽지방에 위치하고, 산보다 평야가 많아 풍요로운 농경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농악과 농요를 비롯한 농경민속춤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농경지를 향한 ‘앉은춤’, ‘엎드린춤’, ‘굴신춤’ 등 대지지향적인 ‘하향춤’이 많으며, 주로 손으로 이루어지는 농경생활은 농경모의적인 손춤, 팔춤, 곡선춤이 발달했다. 북쪽지역의 도약춤과 대비되는 남쪽지역의 춤 특징인 ‘답지(踏地)춤’을 비롯하여 ‘평걸음’, ‘지숫는 춤’, ‘양팔 들사위’ 등 수평춤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약을 억제하는 평면적인 춤과 빠르지 않으면서 흥이 넘치는 손춤, 내면적인 멋을 가진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같은 예인들의 춤이 주로 전승되고 있다. 세시풍속에 따른 추석문화권춤 세시풍속을 지역문화권으로 나누는 민속학계의 통설은 북부지방의 단오문화권, 중부지방의 단오·추석문화가 복합된 백중문화권, 따뜻한 서남지역 평야지대의 추석문화권으로 구별한다. 민속학자 김택규는 단오권이 ‘도당굿-입체적·동적’, 복합권이 ‘별신굿-평면적·동적’, 추석권이 ‘당산굿-평면적·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춤문화권 역시 단오권은 수직적·입체적·동적인 춤, 추석문화권은 수평·평면·정적인 춤, 복합권은 그 중간으로 수직·수평과 입체적·평면적인 정중동의 춤이다. 그중 호남지방은 추석문화권으로 넓은 평야가 있는 곡창지대에서 풍년을 가져다 준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며 그 기쁨의 축제를 벌이는 지역이다. 이들은 천신보다 지모신을 더 숭배하는 대지지향적 하향춤과 땅을 자근자근 밟는 강강술래의 답지춤, 수평적인 양팔사위와 여밀사위 등의 하향춤을 많이 춘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광주·전남지역춤은 부드럽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느린춤’, ‘곡선춤’, 아래로 여미는 ‘하향춤’과 손목놀림이 많은 ‘손춤’이 발달하였고, 발걸음춤으로는 부드럽게 대지를 밟아주는 ‘답지(踏地)춤’이 발달하였다. <정범태(2006), 한국백년1, 서울: 눈빛출판사, pp.12~13.> 광주·전남지역 농악춤 한국의 농악권은 호남 우도농악, 호남 좌도농악, 경기 및 충청농악, 영동농악, 영남농악 등 다섯 지역으로 나뉜다. 호남지방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우도농악과 좌도농악, 두 가지 유파로 분류된다. 호남 우도농악은 익산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평야지대로 쇠와 장구춤을 중시하고 가면잡색놀이가 특징이며, 당산제와 마당밟기를 중심으로 부포상모춤, 고깔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장구가락이 아주 발달하였으며 윗놀이보다 밑놀이가 발달하였고 악기별 개인놀이가 발달하였다. 이에 비해 호남 좌도농악은 전주, 남원, 여수로 이어지는 산악지대로 쇠와 장구놀이를 중시하고 잡색탈춤과 동물 등 배역놀이가 발달하였으며, 고깔보다 전립을 쓰는 채상소고춤이 발달하였다. 우도농악보다 가락이 빠르고 윗놀이가 발달하였으며 집단적인 진풀이가 특징이다. 특히 호남지방에서 걸립패들의 농악은 곡창지대에서 판굿에 대한 후한 쌀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능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탈춤 종목이 독립적으로 발달되지 못하고 잡색(雜色)들의 가면극놀이가 농악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소리춤의 대표 <강강술래> 소리춤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장르를 말하며 대표적으로 강강술래가 있다. 남성들이 추는 소리춤과 여성들이 추는 소리춤으로 나눌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여성소리춤이 많이 발달했다. 기본적으로 원무 형식의 집단춤이지만 놀이적인 것이 혼합된 대형변화 형식도 많다.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에는 고사리 꺾기, 청어엮기와 풀기, 덕석몰이, 바늘귀 꿰기, 남생아 놀아라, 쟁기질놀이, 문지기놀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강강술래는 일반적으로 여성소리춤으로 분류하고 있다. 남녀유별(男女有別) 사상이 깊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춤에서도 이런 현상이 깊게 투영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일본해군의 야간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부녀자들이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며 강강술래를 하였으며, 그 시간동안 군사들은 잠을 자고 대낮의 전투를 대비했다는 이야기가 강강술래의 기원설로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현재도 전남 여러 지역의 강강술래가 여성소리춤으로 전승되고 있다. 하지만 신안 비금도 등지에서는 남녀가 함께하는 강강술래가 전승되고 있기도 하여 지역에 따라 남녀소리춤으로도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이매방의 승무와 살풀이춤 이매방(1927~2015)은 전남 목포출신으로 어린 시절 집 옆의 목포권번에서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의 가르침으로 기방춤 기본을 익혔고, 이대조(검무, 승무), 박영구(승무, 법고), 이창조(검무)등으로부터 전통춤을 다졌고, 6·25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서도 춤을 계속하였다가 상경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1987), 제97호 살풀이춤(1990)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평소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지”라는 말씀을 하였으며, 여성보다 더 고운 춤을 춘다는 평을 받았다. ‘하늘이 내린 춤꾼’, ‘국무(國舞)’등의 칭호를 붙인 『이매방화보집』(이병옥·김영란 집필, 2011)을 봉정할 만큼 이수자들만도 수백 명에 이르며 명무제자(너무 많아 명단 생략)들도 수두룩한 범한국적인 최정상의 춤꾼이었다. 한진옥류 검무와 재인춤 광주·전남지역 명무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타지방에서 춤사범이나 춤꾼으로 생애를 보낸 이들(강태홍, 박지홍, 김계화, 이매방 등)이 많은데, 이에 비해 끝까지 고향을 지킨 명무에는 한진옥(1911~1991)을 꼽을 수 있다. 한진옥은 ‘못 추는 춤이 없는 춤의 팔방미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그가 선대 명무였던 이장선(굿거리·바라무·살풀이·부채춤·승무 등), 신갑도(팔도 검무), 이창조(검무, 창), 장판개(창) 등으로부터 다양한 춤과 소리를 전수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있다.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은 많았었는데, 대부분이 떠나자 "지방에 살다 보니 알아주던 사람도 떠나가고 남는 건 회한뿐”이라며 "백 가지 재주 가진 사람이 끼니 간 곳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곤 했었다. 자칫하면 맥조차 끊길 뻔했던 스승의 ‘팔방춤’의 맥을 제자 김다복, 임순자가 잇고 있을 때 지역의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공연 해설 때마다 강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떠나고 김자연 등이 겨우 맥을 있고 있어 안타깝다. 속히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의 맥을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옥진의 <1인 창무극>과 허튼춤 ‘1인 창무극’의 선구자로 알려진 공옥진(1931~2012)은 곱사춤, 병신춤, 원숭이춤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이 시대의 광대춤꾼이었다. 전남 영광 출신으로 남도 판소리의 대가였던 아버지 공대일에게 창을 배웠다. 1945년께 조선창극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고 고창 명창대회에서 장원에 입상했다. 1973년 남도문화제에서 '1인 창무극'을 창안하였고 1978년에는 익살맞은 병신춤과 판소리 창이 곁들어진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정병호(중앙대교수)에 의해 발굴된 공옥진의 특이한 춤들은 병신춤 외에도 곱사춤, 원숭이춤 등 동물을 모방한 춤으로 천연덕스러움과 청승맞음이 담겨있었으며, 『병신춤을 춥시다』(1982, 문순태 저)로 공옥진의 인생유전(人生流轉)이 세상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당시 ‘1인 창무극’ 공연을 봤던 필자는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범벅으로 울었다가 배꼽 빠질 지경으로 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장애인 단체의 거센 반발로 병신춤은 사리지고 동물 모방춤만 추게 되었으며, 그 후 뇌졸중으로 오래 고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전남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무대에 서는 투혼을 보여주었고, 필자가 해설을 했던 제 71회 <한국의 명인명무전>(국립극장)에서도 살풀이춤으로 생애 마지막 무대를 선보여 커다란 감동을 주고 떠났다. 박병천의 진도북춤과 씻김굿 진도북춤의 명인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 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박병천 명인(1932~2007)은 무용계에서는 ‘진도씻김굿’보다는 ‘진도북춤’ 명인으로 추앙받았으며, 모두가 ‘박병천의 진도북춤’이라고 할 정도로 대표명칭이 되었다. 박병천 명인의 춤바디도 우리가 흔히 아는 곱디 고운 기방계춤이나 고고하고 담백한 재인계춤 바디가 아닌 독특하고 투박한 민간계 춤바디를 지녔다. 박병천 명인이 보유한 예능 중 최고의 걸작은 ‘구음시나위와 징(鉦)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전통춤꾼들은 앞을 다투어 살풀이춤이나 입춤 등의 반주곡으로도 많이 쓴다. 그런데 필자가 본 많은 공연무대에서는 구음소리만 들리고 춤이 묻혀 버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박병천의 구음소리가 워낙 심금을 울리니까 관객들은 춤보다 소리 감흥에 매료되어 춤이 눌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춤의 기량과 끼가 박병천 구음소리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춤꾼이 아니면 소리에 매몰될 수밖에 없을 정도이니 이 시대의 명인 중의 거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광주·전남지역은 지리환경의 영향으로 좌·우사위(수평적, 평면적)가 많고 ‘땅기운이 온몸으로 지피는 춤(대지지향, 하향춤)과 땅을 밟는 춤(답지춤)’이 특징이다. 또한 넓은 평야와 농경지가 많아 농악(우도, 좌도농악)과 소리춤(강강술래)이 발달하였다. 추석 때가 되면 햇곡식과 햇과일의 추수를 천신과 지신에 감사드리는 추석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육자배기토리의 노래와 시나위 선율이 발달한 관계로 춤도 흩어지다 모아진 산조(散調) 음악의 느린 장단에서 점차 빠른 장단을 넘어가며 자지러질 듯 혹은 숨죽일 듯 손사위를 펼치는 ‘산조춤’과 구구절절 맺힌 한과 삶의 애환을 담았다가 차원 높은 신명으로 승화하는 ‘살풀이춤’, 그리고 농경사회의 영향을 받아 민초들의 고단함이 녹아있으면서도 풍요와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허튼춤’이 발달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노동요 등이 지정되면서 광주·전남지역의 무형문화재에 판소리와 고법 12종목, 농악 6종목, 민요와 노동요가 15종이나 지정되어 가히 예향다운 면모를 보여주며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춤 분야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호남출신 이매방 명무를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풀이춤 보유자로 지정하였을 뿐이며, 광주·전남지역에서는 한 종목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아 지역춤들이 소멸될 위기에 있어 매우 안타깝다. 이병옥은 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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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국의 지역춤, 대구·경북지역의 춤지리와 기후환경에 따른 대구·경북인의 기질 대구·경북지역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심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신조어를 쓸 정도로 무더운 날이 많다. 그리하여 대구·경북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중시하며 이러한 생태환경적 배경으로 대구·경북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여 발전시켜왔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배경과 춤전승 대구·경북지역은 역사적으로 서라벌(경주)을 도읍지로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행정, 산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의 중심이 송도(개성)와 한양(서울)로 옮겨진 고려와 조선시대까지도 영남호족의 세력이 여전히 핵심을 유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선비(양반)정신’이 깃들어 있는 독특한 지역춤의 특성을 전승하여왔다. 신라시대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는 가야지무(伽倻之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琴舞)가 있었고, 계고(階古)에게는 가야금을, 법지(法知)에게는 노래를, 만덕(萬德)에게는 춤을 각각 가르쳤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뿐만 아니라 황창무(黃昌舞)와 처용무(處容舞), 상염무(霜髥舞), 무애무(無?舞), 오기(五伎) 등 남성춤도 많았다. 그밖에도 도솔가무(兜率歌舞), 회소곡(會蘇曲), 그리고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 등 민간생활과 밀접한 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의 관기와 권번춤 전승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와 상주로 이어져 온 경상감영이 1601년(선조34년)에 대구로 이전하게 되면서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국가와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지금의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일대)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년,영조 43년),『대구읍지大丘邑誌』(1768년 발간), 『경상도 읍지』(1832년경), 『영남읍지』(1871년경,1895년),『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1888) 등>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모임이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등 4명이 대구기생조합이나 서울로 진출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 중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 김천조합 소속이 3명이나 기록되어 있고,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을 잘 추었다고 하였다.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27년 ‘달성권번’이 새로 설립되었다. 무형문화재 종목의 연희와 춤들 대구·경북지역이 고대부터 근대까지 영남지역의 중심지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제침탈의 거점인 부산·경남지역이 중심도시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유교와 양반문화를 비롯한 예술문화는 여전히 대구·경북지역에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농악영남지역 농악이 다른 지역 농악과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고깔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영남북부권이 남부권보다 더 큰 고깔을 쓰는 경향을 보이며, 판굿도 발달하여 7종목(고산, 욱수, 청도차산, 금릉, 비산(날뫼), 구미무을, 경산보인)이나 지정되어 있다. 그 특징은 원박적이고 아주 빠른 리듬과 웅장한 북춤과 화려한 고깔춤이 발달했으며, 천왕매기굿(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나 지신밟기에서 잡귀잡신을 쫓는 힘찬 덧배기가락과 덧배기춤이 발달했으며,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와 뒤풀이춤이 발달했다. 고산농악(대구 1호)은 농기구를 앞세우고 태극무늬로 도는 덩덕궁이, 원을 돌며 각자 춤추는 춤굿, 손잡고 원을 돌면서 닭을 쫓는 닭쫓기, 나선형(螺旋形)으로 들어갔다 풀어 나오는 방석말이 등이 특징이다. 욱수농악(대구 3호)은 동제당 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천왕받이굿과 원형으로 춤을 추는 둥글데미, 세로 2줄로 마주보고 앉은 연주자들을 상쇠가 Z형으로 빠르게 돌면서 징·북·장구·법고 열로 끊어 일으켜 풀어나가는 외따기와 흥겨운 어깨춤을 추는 덧배기춤 등이 특징이다. 청도차산농악(경북 4호)은 천왕기(天王旗)싸움에서 발달한 농악으로 꿋꿋하고 향토적인 옛스러움과 질박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장단을 외가락으로 빨리 몰아가는 경우가 많아 소박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금릉빗내농악(경북 8호)은 마을의 성황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가 섞여진 동제(洞祭)의 형태로 진풀이 농악과 무당굿과 줄다리기 등이 혼합되어 가락이 매우 강렬하고 종류도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뫼북춤(대구 2호)은 대구비산농악에서 북을 연주악기로 추는 북춤만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특유의 덧배기가락(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덩덕궁이, 자반득이(반직굿), 엎어빼기, 다드래기, 허허굿, 모듬굿, 살풀이굿, 덧배기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무을농악(경북 40호)은 쇠와 소고는 전원이 전립에 상모를 쓰고 이외에 배역들은 모두 백색의 큰 고깔을 쓰는데, 고깔의 꽃송이들은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게 한다. 길굿가락과 정적궁가락, 덧배기가락 등 경상도 특유의 쇠가락이 발달하였다. 경산보인농악(경북 41호)은 전형적인 모의농사굿 형식이면서도 다른 지역과 달리 글자놀이가 발달하였고, 섬세한 덩덕궁 가락과 삼채가락이 조화를 이루고, 특유의 별다드래기장단과 덧뵈기장단이 가락의 주를 이루어 화려하고 웅장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탈춤탈춤은 부산·경남지역 낙동강 하류에 7종목(야류·오광대)이나 국가 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고 연희적인 면이 발달했으나, 대구·경북지역은 별신굿놀이 성격으로 재담이 적고 연희보다 의식성이 많은 하회별신굿탈놀음(국가 69호)과 예천청단놀음(경북 42호) 2종의 탈춤이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별신굿이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하며, 더불어 수호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춤을 추었다. 하회별신굿탈놀음의 탈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10종11개)로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음의 반주는 꽹과리 중심의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지는데 우리나라 탈춤의 기원과 전승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천청단놀음은 대구·경북지역의 향토성을 보이면서 벽사진경을 추구하는 주술성과 상류층에 대한 풍자를 투박한 춤과 몸짓, 토속적인 가락에 실어서 전달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키로 만든 큰 탈이 쓰인다는 점, 신령스런 동물이 부정을 물리치는 듯이 하는 동작과 춤에 커다란 부채모양의 주지판이 사용된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 소리춤안동놋다리밟기(경북 7호)는 안동지방에서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여성들만의 민속놀이로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를 데리고 안동으로 피난을 와 개울을 건널 때 마을의 부녀자들이 허리를 굽혀 다리를 놓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놋다리밟기는 맨 앞에 노년부터 젊은 부녀자 순으로 수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허리를 굽혀 앞사람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머리는 앞사람의 궁둥이 왼편에 대는데 마치 생선을 꿰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시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공주가 등(다리 역할) 위를 밟고 지나가면 밑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행렬 맨 앞에 구부려 다리는 그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안동놋다리밟기는 모든 여성이 한데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즐기는 규모가 큰 향토오락으로 승부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리춤으로 호남의 진도 해남 등지에 강강술래가 있다면, 영덕지역에는 월월이청청(비지정)이 있다. 노래와 춤놀이에는 달람세, 절구세, 둥둥데미, 실감기 등의 소리춤이 전한다. 근대 춤 전승 인맥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부산·대구지역만 남게 된 정부는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현재 대구 CGV한일극장으로 재건축)을 지정하여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의 공연이 집중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소산 → 백년욱(대구 18호)정소산(호 小山, 본명 鄭柳色, 1904~1978)은 1900년대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춤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교방춤의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출생으로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하규일(1867-1937)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고,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보면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을 묘사했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가르쳤다. 제자 백연욱은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타계할 때까지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 정소산류 수건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이 춤은 궁중춤과 민속춤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의 수건춤으로, 처음 등장하여 먼저 절을 올리고 춤을 추는 궁중춤의 예법과 춤사위가 장중하고 단아하며 절제미가 있는 점이며, 춤이 전개됨이 따라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흥을 돋우는 민속춤의 요소도 함께 담고 있다. 박지홍 → 권명화(대동권번, 대구 9호), 최희선(달성권번)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姜太弘,1893-1957)이 부산 등지로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958)이었다. 박귀희(朴貴姬), 박초향(朴初香),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등이 판소리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이때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에서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다. 1940년 전후로 설립된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1929~2010)은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웠고,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웠다. 한영숙에게 전통춤을 사사받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다시 배워 달구벌 입춤 명무로 유명하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1995년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권명화 살풀이춤의 특징은 수건으로 고(苦)매듭을 엮었다 푸는 살을 푸는 과정이 유일하게 담겨있고 영남교방춤과 덧배기 춤가락이 깃들여 있는 점이다. 그밖에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였다. 김상규 → 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박성실 등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인물은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다. 김상규는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로 판검사가 되겠다는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가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다. 이처럼 해마다 작품 발표회를 하다 보니 논밭을 팔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더욱 높아졌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가로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정막(정순영)과 김기전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문교부 인가)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으며,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당시 대구)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 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대구·경북지역의 춤 미래 대구·경북지역이 오랜 역사의 부침(浮沈)속에서도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 북부춤의 중심적 특징과 더불어 향토춤의 특징을 온전히 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춤 신명이 많고 춤추기를 좋아하는 지역의 심성에서 비롯하였다고 본다. 20세기 초기에는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고, 뒤를 이어 20세기 후반에는 최희선, 권명화(대구 9호), 백년욱(대구 18호) 등이 그 명맥을 이어받았다. 현대춤과 발레 역시 끝까지 지역을 지켜 온 김상규(안동대 교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지역출신 무용교수가 많은 것도 근원적으로 춤의 고장이기 때문이지만 김상규가 대학교수로 무용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대학 무용학과를 개설하고 춤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진출한 이숙재(한양대 명예교수), 김복희(한양대 명예교수), 박인숙(한성대 교수), 백현순(한체대 교수) 등이 ‘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에서도 구본숙(영남대 명예교수), 박연진(대구 가톨릭대 명예교수), 임혜자(계명대 명예교수), 김현옥(계명대 교수), 장유경(계명대 교수), 김희숙(무용가), 박현옥(대구가톨릭대 교수), 김소라(대구가톨릭대 교수), 이화석(대구예술대 교수), 강정선(대구무용협회장), 김죽엽(한국무용가), 최두혁(계명대 교수), 오레지나(대구가톨릭대 교수), 채명(무용평론가), 김용철(섶무용단), 손윤숙(발레) 등과 수많은 무용가들이 대를 이어 대구·경북춤의 정신을 고양하면서 세계를 향해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춤의 인프라는 2015년 이래 매년 세계안무페스티벌(DICFe, Daegu International Choreography Festival)을 펼치며 세계적인 안무도시로 발전하는 초석을 다져 나가고 있다. 이병옥/전통예술 연구가, 용인대 무용학과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 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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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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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이병옥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 송파산대놀이 전수 교육조교 선정 (1981) (사)국가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 (2010-2022) 종신 국가무형문화재 '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2023. 7) (사) 송파민속보존회 이사장 ( 20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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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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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회 송파산대놀이 정기공연 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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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하는 송파산대놀이, 보러가자29일 토요일, 오후 3시 제58회 송파산대놀이 정기공연이 개최되는 서울놀이전수관을 찾았다. 반가운 봄비가 소슬소슬 내리는 가운데 둥근 돔 모양의 천막으로 친 마당에서 신명나는 탈춤판이 벌어졌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앞 줄에 자리를 잡고 박경래 송파구청장, 김웅 국회의원, 정창래 송파구의회의장을 비롯한 김광철, 장종례, 이강무, 전 정 의원이 참석해서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탈과 탈춤의 기원은 원시 수렵과 어로생활에서 동물탈을 쓰고 위장하여 사냥의 성과를 올리는 한편, 사냥 성공을 기원하며 탈춤을 추거나 그 염원을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 서울경기에서는 '산대놀이' 혹은 별산대놀이, 황해도 지역에서는 '탈춤' 도는 '놀탈', 강원도 지역에서는 '탈놀이'로 경상도에서는 '들놀음', '오광대', '탈놀이', '별신굿놀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약 250여 년 전부터 송파진, 현재 잠실 석촌호수 남쪽 주변,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한강 줄기 주변에 서던 송파장을 중심으로 연희되어 온 산대탈놀음이다. 1973년 11월 국가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산대놀이는 구파발, 애오개(阿峴), 사직, 녹번, 노들(露梁津) 등지에 전승 되었으나 모두 소멸되었다. 현재는 경기도 양주와 서울의 송파지역만이 전승되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퇴계원산대놀이가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년 ‘한국의 탈춤’ 18종이 유네스코 인류뮤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병옥 교수에 의하면 "송파산대놀이는 오늘 보여주는 탈놀음 12마당이 온전히 전승되고 있으며, 탈 32개가 되는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전한다. 연희 순서는 먼저 산대놀이 기를 앞세우고 풍물을 치며 탈춤을 추면서 길놀이로 마을과 장터를 돌아와 탈을 벗어 고사상 앞에 놓고 탈고사를 지낸 다음 12마당을 진행한다. 기미양 객원기자가 당일 행사장에서 이병옥 명예보유자에게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주체 및 연행과 예술성에 대해 살펴보았다.(편집자 주) Q. 송파산대놀이 유래 및 역사는 A. 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송파진은 전국 15대 향시(鄕市) 중의 으뜸인 상역지로 강원도의 뗏목상인과 삼남지역의 마행상과 보부상들이 몰려들어 270여개의 객주집이 성행한 장터였다. 연희형태는 춤이 주가 되고 시대상을 풍자하는 재담과 창 등 여러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 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Q. 반주음악은 A.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 장구, 북, 피리2, 대금, 해금)의 악기구성으로 염불 12박, 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당악, 자진타령, 자진모리, 휘모리장단 등이 쓰인다. 춤사위로는 염불 거드름춤, 타령 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서나 대치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갈등이 핵심이라는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혁성을 가지고 있죠.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A.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죠. Q. 보다보니 등장인물마다 여러 춤사위가 나와서 웃음이 나옵니다. 장단에 따라서도 다르면서 유사한 춤사위가 궁금합니다. A.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 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 여러 탈춤 중 송파산대놀이 춤사위 중 깨끼춤이 백미 중 백미라고 하는데, 과장마다 등장 인물마다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네요. 가장 인기있는 깨끼춤은 A. 탈춤 중 송파가 가장 많은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고, 40여 종이나 넘네요.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그 중 가장 인기있는 춤은 기본적인 화장무가 가장 섹시하고 화려한 춤새를 보여주죠. Q. 굿거리장단에 맞추어서 추는 건드렁춤은 주로 다음 막이 오르때,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건들건들 거리면서 나오니까 관중들이 와 하면서 흥을내는 데요. 등장인물마다 추는 춤새가 정해져 있고, 다양한 것 같아요. A.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 걸음으로 등장하면 박수가 나오지요. Q. 탈춤을 출때, 복장과 탈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요. A. 탈춤 종목 중 송파가 가장 많은 탈을 보유하고 있죠. 가장 관객이 많은 한양이라는 지역성과 궁중에 불려간만큼 자본이 달리지 않았죠. 외국 사절이 오면 요즘으로 말하면 카퍼레이드 환영인사 같은 거죠. 사직동 모화관가지 거리 공연을 하면서 외국사절을 모시고...매일 공연도 보여주고, 지방에 있는 탈춤과는 관객의 눈높이가 높았죠. 한양으로 몰려드는 전국소리패들, 광대패들과 경쟁을 해야하니...자연히 분장도구가 화려해지죠. 탈은 바가지로 만든 탈인데,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을 입는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합니다. Q. 민족문화예술 '탈춤'의 예술성에 대해서 강조하신다면 A. 탈춤은 재담과 노래, 가무극적 총체성을 띠고 있죠. 재담이나 노래에 비하여 춤을 위주로 하고, 거기에 연극성까지 구비해야 박수를 받죠. 풍자성이 강한만큼 탈을 쓴 등장인물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잘 나타내 주어야 하고,..가무에 능해야 하고. Q.인류무형문화유산 '탈춤'의 보편적 가치는 A.부조리와 갈등을 풍자하는데 머물지 않고, 해원상생을 위한 전통유산이며,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는 거지요. Q. 오월에는 축제의 달인데, 초청공연 가는 지역 축제는 어디인가요. A.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6일, 안동민속축제 7일,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지역사회 복지관에서 8일 공연합니다. Q. 전승교육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A. 10여년 동안 송파구 중대초등학교에서 송파산대놀이를 가르쳐왔다. 그런데 교장이 바뀌면서 올해부터는 수업이 사라졌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링 자랑스런 민속예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나아가 사회변화에 대한 변혁성을 담보하고 있다.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세계 유네스코 신사위원단은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주목했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했다. 이러한 탈춤의 보편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는 기회와 장이 확대되기를 바란다. 첫째마당: 상좌춤놀이 첫째상좌가 맨 처음 등장하여 중앙에서 염불장단에 합장배를 하면서 천신께 탈춤의 시작을 알리고, 사방재배를 하며 놀이판을 정화하고 성황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춤판이 무사히 끝나도록 기원하는 의식무이다. 이어서 타령장단에 깨끼춤을 추면 둘째상좌가 등장하여 서로 대무하고 첫째상좌가 퇴장한다. 둘째마당: 옴중·먹중놀이 옴중이 제금을 치며 요란하게 등장하여 장내의 잡귀를 몰아내고 둘째상좌도 내쫓고 염불장단에 용이 승천하는 용틀임춤을 추고 놀 때 먹중이 등장하여 서로의 얼굴을 못생겼다고 흠 잡으며 곰보타령 사설을 늘어놓는 것이 흥미롭고, 비위생적 생활에서의 옴(전염병, 악귀) 발생을 예방의 중요성을 알린다. 셋째마당: 연닢·눈끔재기놀이 양반인 연닢과 눈끔재기가 얼굴에 흠이 있어 과거도 못보고 양반사회에서 소외당하지만 서민들인 먹중들은 이들을 받아들여 어울려 놀면서 서민들의 포용력을 부각하고 양반사회의 폐쇄성을 풍자한다. 넷째마당: 북놀이 먹중들이 북을 가지고 장난치며 노는데 왜장녀가 등장하여 예쁜 색시(애사당)가 벗고(법고)를 칠테니 돈을 달라고 하자 돈을 건네준다. 애사당이 옷을 벗지도 않고 법고를 치니 속았다고 북채를 빼앗지만 허세를 부리면 돈만 날린다는 것을 풍자한다. 다섯째마당: 곤장놀이 팔먹중들이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술만 먹고 노는 것을 곤장으로 호되게 다스려 공부를 게을리 하지마라고 훈육한다. 여섯째마당: 침놀이 가난한 서민이 잔치에서 과식 급체하여 쓰러지자 신주부(의원)와 먹중들 사이의 치료방법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여 의원들의 의술을 풍자하고 굶주린 서민생활을 폭로한다. 일곱째마당: 노장놀이 팔먹중이 노장을 끌고 등장하여 색을 탐하면 무서운 질병(흑달)에 감염된다는 경고하고 조롱하지만 노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색을 탐하여 파계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여덟째마당: 신장수놀이 신장수가 원숭이를 업고 등장하여 노장에게 신을 팔면서 불도에 정진하지 않고 여색에만 빠진 수도자에게 원숭이를 보내 조롱한다. 아홉째마당: 취발이놀이 사찰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취발이가 노장이 파계했다는 말을 듣고 홧김에 술을 마시고 취한 채 등장하여 노장을 내쫓고 소무와 합방하며 아들을 낳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공부시키며 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열째마당: 말뚝이놀이 양반집 하인 말뚝이가 양반인 샌님가족을 모시고 나들이 나갔다가 숙소를 돼지우리로 정해주며 놀리면서 서민들을 개돼지처럼 하찮게 여기는 양반들을 역으로 풍자한다. 열한째마당: 샌님·미얄·포도부장놀이 샌님이 본처인 미얄할미를 내치고 젊은 마누라와 놀아나지만 결국은 젊은 포도부장에게 빼앗기는 애정의 삼각관계를 표현하며 부도덕한 생활을 풍자하고 조강지처를 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열두째마당: 신할애비·신할미놀이 노부부의 갈등으로 신할미가 죽자 자식인 도끼와 도끼누이가 애통해 하며 무당을 불러 죽은 신할미의 넋을 위로하는 넋두리와 지노귀굿을 하여 극락왕생을 빌며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는 무속적인 의식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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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송파산대놀이 유래와 역사정의- 서울 송파 지역에서 전승하는 탈놀이 요약-서울·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를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애오개(아현)·녹번•사직•홍제동•구파발•노량진 등지에서 전승하다 소멸되었고, 현재는 양주·송파·퇴계원 산대놀이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송파나루와 장터에서 상업적 배경으로 펼치던 탈놀이이다. 유래 및 역사-조선시대에는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국가적 행사를 담당하여 산대도감놀이가 성행하였다. 산대도감 폐지 후 산대놀이패들이 처음에는 애오개(현재 서대문구 아현동 일대)에 본거지를 두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탈춤을 추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하였으나, 점차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가 사직골, 녹번, 구파발, 노들(노량진)에서 전승되다가 소멸되었고, 지금은 그 맥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 퇴계원산대놀이만이 전승되고 있다. 송파장은 270호의 객주가 성업을 이루어 산대놀이가 성행하였으나 을축년(1925) 한강 대홍수로 송파장과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신송파로 물러나면서 자연히 산대놀이도 시들해졌다. 그 후 송파산대놀이는 1973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신송파 옛 장터에서 전수하다가, 1985년 잠실 석촌호수 공원 안에 송파산대놀이 전수관과 서울놀이마당을 건립하여 전승되고 있다. 내용-송파산대놀이의 열두 마당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당은 상좌춤놀이, 둘째 마당은 옴중, 먹중놀이, 셋째 마당은 연잎, 눈끔적이놀이, 넷째 마당은 애사당 북놀이, 다섯째 마당은 팔먹중 곤장놀이, 여섯째 마당은 신주부 침놀이, 일곱째 마당은 노장놀이, 여덟째 마당은 신장수놀이, 아홉째 마당은 취발이놀이, 열 번째 마당은 샌님말뚝이놀이, 열한 번째 마당은 샌님, 미얄할미, 포도부장놀이, 열두 번째 마당은 신할애비, 신할미놀이이다. 춤사위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상위개념으로 불린다.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은 특수배역만이 추는 춤으로, 첫 상좌의 합장재배와 사방재배, 옴중의 용트림, 노장의 복무(伏舞)와 함께 부채춤, 팔뚝잡이, 활개펴기, 활개접기, 장삼치기, 복무, 삼진삼퇴 등이 있다. 타령장단의 깨끼춤은 송파산대놀이 춤의 기본이 되며 흥과 신을 풀어내는 춤이다. 집단적이며 민중들의 순수한 감정에서 생성된 춤이기 때문에 주로 팔먹중, 취발이, 말뚝이와 같은 민중성을 띤 인물들이 춤을 춘다. 깨끼춤 종류로는 화장무, 반화장, 자진화장, 곱사위, 여닫이, 긴여닫이, 배치기, 어깨치기, 깨끼리, 염풍댕이, 돌단이, 거울보기, 팔뚝잡이, 멍석말이, 덜미잡이, 자라춤, 장단먹기, 궁둥치기, 배춤, 갈지자춤, 몰아치기, 장삼치기, 한삼치기, 몰아치기, 장삼치기,한삼치기, 맞춤[對舞]과 더불어 양반까치걸음, 취발이까치걸음, 빗사위, 갈지자걸음, 뒷짐걸음, 원숭이재롱춤, 활개걸음, 건드렁, 껑충걸음 등의 걸음걸이가 있다. 굿거리장단의 건드렁춤은 주로 등장사위에서 건들걸음으로 추는 춤이다. 건들걸음의 춤사위 종류는 뒷짐사위, 들사위, 쳐들사위, 흔들사위, 돌사위, 멜사위 등이 있다. 그밖에 배역에 따라 연닢·눈끔쩍이는 한손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은 뒷짐이나 들사위로 등장하고, 말뚝이는 채찍을 휘돌리며 채찍춤을 추면서 샌님 가족을 이끌면서 뒷걸음, 돌걸음으로 등장한 다음 깡총걸음으로 장내를 뛰어 돌며 채찍을 휘돌린다. 이때 샌님·서방님·도련님의 걸음걸이는 한발 까치걸음으로 부채를 내렸다 들었다 하다가 건들걸음으로 들어와 나란히 자리 잡는다. 신할아비·신할미는 허리가 굽은 상태로 지팡이를 짚고 나머지 손은 뒷짐을 지고 어기적걸음으로 등장한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알려진 전승자들은 조영완(1865∼1949, 왜장녀•소무•가면 제작), 윤종현(1880∼1953, 옴중•가면 제작), 김도환(1889∼1951, 첫째 상좌•노장), 유천식(소매•애사당), 김동현(취발이) 등이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종현을 지도자로 하여 돌말이 놀이꾼들에 의해 계승된 1930년대에는 김순길(소매•팔목), 엄준근(옴중•신할아비), 이범만, 여태산 등이 활약했다. 지정 당시 예능 보유자는 이충선(李忠善, 1910∼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澗澤, 1904∼1979, 첫째 상좌•취발이•초라니), 이범만(李範萬, 1907∼1984, 옴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5∼1990, 말뚝이•가면 제작) 등 여섯 명과 후임 보유자 김학석金學錫(1940∼2014, 무당)도 작고하였다. 현재는 명예보유자 이병옥(李炳玉, 1947∼, 상좌·취발이)과 보유자 함완식(咸完植, 1956∼, 옴중•먹중)과 전승교육사로 안병인(安浦仁, 1954∼, 먹중), 이수환(李修煥, 1958∼,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말뚝이), 이영식(李榮植, 1954∼, 팔먹), 강차욱姜次郁, 1964∼, 악사) 등을 비롯하여 활동 이수자인 전철규, 서병무, 전경희, 이한복, 김영숙, 탄종원, 김대현, 임채현, 장규식, 양흥기, 함승헌 등과 전수자인 강춘선, 어원석, 이준녕, 김태현, 김갑수, 이효녕 등과 악사 전수자에 김문조(피리), 엄태양(대금), 김희경(해금) 등이 전승활동을 하고 있다. 반주 음악-길놀이에서 연주하는 행진음악과 놀이판에서 연주하는 반주음악을 나눌 수 있다. 길놀이에는 호적 한쌍·북·장고·바라로 편성되며, 행진에는 길군악으로 ‘능계’라는 음악을 연주하고, 길놀이과정에서 넓은 공터나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소에서는 멈추고 춤판을 벌리면 타령을 연주한다. 놀이판에서 춤의 반주에는 북·장고· 피리 한쌍·젓대·해금으로 편성된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쓴다. 길놀이 때 굿거리 장단의 선율은 창부타령과 비슷한 경토리로 되어 있다. 탈 마당에서는 배역에 따라 긴염불 장단과 허튼 타령과 굿거리 장단과 당악 장단을 쓴다. 복식ㆍ의물ㆍ무구-탈은 바가지탈로 소나무 껍질을 깎아 눈썹, 코, 볼, 입을 붙이고 한지(韓紙) 조각으로 여러 겹 덧붙여 말린 다음 단청(丹靑)으로 채색하여 보자기를 붙여 머리에 쓰고 묶는다. 복식은 팔먹중들은 반장[赤·靑·黃·綠色]에 옷깃과 허리 띠는 주로 붉은 색이나 대비색이며, 각 배역마다 신분적 특징을 보여 주는 의상이다. 의물과 무구도 배역에 따른 것으로 양반들은 합죽선, 취발이 녹음채, 말뚝이 채찍, 먹중갑(완보)은 곤장, 무당은 방울·부채, 샌님·미얄은 지팡이 등을 사용한다. 특징 및 의의-송파산대놀이는 상역지의 거부 거상들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연희 규모도 컸으며 줄타기, 씨름대회, 풍물, 민요등 성대한 놀이판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이해타산도 작용하고 있었기에 놀이판의 성격이 달라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연희의 실제적인 주도권은 추렴한 상인들이었다. 둘째, 연희 시기는 장꾼을 끌 수 있게 비교적 농한기인 오월단오, 칠월백중을 택했다. 셋째, 전문성을 띤 유명한 연희자들을 초청하여 놀이판을 성대히 만들었다. 넷째, 외부 장꾼과 별로 관계없는 길놀이는 약화되었다. 다섯째, 연희 장소도 마을 공터, 산기슭, 강가 등지에서 하던 것을 장터로 설정하였다. 여섯째, 놀이판의 규모도 커지고 관람 질서를 유지하고자 탈판에 금줄(새끼줄)을 치고 차일(遮日)도 쳤으며, 등•퇴장로도 만들었다. 그리고 춤사위의 형식적인 면에서 해서 탈춤(봉산•강령•은율)과 비교하여 산대놀이 춤사위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섬세하고 다양한 춤사위를 지니고 있다. 둘째, 동적인 춤사위보다 정중동靜中動의 춤사위가 발달하였다. 셋째, 염불장단의 춤이 발달하였다. 넷째, 팔사위에서 뿌리는 ‘한삼춤’보다 감치고 조이는 ‘손춤’이 많다. 다섯째, 도약무跳躍舞보다 답지무踏地舞가 발달하였다. 정사항-국가 무형문화재(1973) 송파산대놀이 기타-송파산대놀이는 극적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유사하게 열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나 마당구성의 짜임이 약간 다르다. 또한 다 같이 바가지탈을 사용하지만 탈의 수가 서른두 개로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 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더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다. 송파산대놀이의 춤은 중부 지역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40여 종 이상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주제어-산대, 산대도감, 본산대놀이, 송파나루, 송파장, 상역지, 양주별산대놀이 참고문헌-이병옥, "송파산대놀이", 피아, 2006, 허호영, 「송파산대놀이 대사」,"서낭당" 3호, 한국민속극연구소, 1972, 이병옥, "송파산대놀이 연구", 집문당, 1981, 이두현,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90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1, 이두현,"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필자-이병옥(李炳玉) 복합매체(multi-media) 사용 목록표] 사용 목록표 원고의 내용 이해를 도울 복합매체(이미지, 영상, 음원 등) 자료 정보 총 3건 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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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무형문화유산 '송파산대놀이' 전승활동과 과제 (3)지난 달 29일 송파산대놀이 공개 행사에서 전 12과장이 모두 연행되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과 가락동 일대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으로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로 이충선(李忠善, 1901-1989/ 장고·대금·피리), 김윤택(金潤澤, 1904-1979/ 첫째상좌·취발이·초랭이), 이범만(李範萬, 1907-1984/ 팔먹중·샌님), 한유성(韓有星, 1908-1994/ 포도부장·샌님), 문육지(文陸地, 1913-1992/ 둘째상좌), 허호영(許浩永, 1914-1990/ 말뚝이·가면 제작)의 6명이 인정되었으며 모두 작고했다. 현재는 보유자 김학석(金學鉐, 1940- / 연희(무당)), 함완식(咸完植, 1956- / 옴중·먹중)과 전수교육조교 김성운(金聖運, 1945- / 피리), 안병인(安炳仁, 1954- / 먹중), 이병옥(李炳玉, 1947- /취발이), 이수환(李修煥, 1958- / 노장), 김명하(金明河, 1955- / 말뚝이) 등이 송파산대놀이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 Q. 현재 송파산대놀이보존회에서 전하고 있는 연희본의 존재가 궁금합니다. A. 이두현본(1971년), 허호영본(1972년), 이병옥본(1982년)이 있는데, 현재 송파산대놀이 연희 교재로 쓰이고 있는 것은 1980년까지 제가 당시 예능보유자 이범만, 한유성, 문육지, 김윤택, 이충선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하여 정리한 연희본 이병옥본으로 전수를 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의 가면극 구성과 배역, 내용이 12과장이 어떻게 다른가요 A. 송파산대놀이는 가면극의 구성이나 내용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 12과장과 거의 유사하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신할미·무당 등 산대도감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학계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라는 명칭에서 '산대'라는 명칭은 A.서울, 경기지방에서 전승되는 탈춤을 산대(山臺)놀이라고 부르며, 현재는 양주와 송파 두 지역의 '산대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산대(山臺)라는 명칭은 일명 채산(彩山), 채붕(綵棚)이라는 가설무대로서 주로 궁중에 설치하였습니다. 송파산대놀이처럼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성행한 ‘가면극’에 ‘산대놀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산대놀이의 ‘산대’가 뫼 산(山) 자에 무대 대(臺)자로 이뤄진 것과 같이 ‘산과 같이 큰 무대’, ‘비단으로 장식된 무대’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놀이가 열린다’라는 깃발을 들고 돌지만 예전에는 산대놀이를 앞두고 조금 큼직하게 만든 우마차 위에 얇은 판을 깎아 산 형상을 층층으로 올려 만든 ‘산대’를 끌고 다니며 연희 구경을 오라고 알렸다고 합니다. ‘산대’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여졌습니다. Q. 양주별산대놀이에서 '별'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A. 양주별산대놀이의 경우 이름에 ‘별’ 자가 추가된 것은 기존 놀이패들의 맥을 이은 것이 아니라, 양주읍에서 ‘별도’로 만들었다고 해 붙여진 글자이고, 노들산대, 구파발산대 등을 이은 송파산대놀이야말로 조선 시대 산대놀이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Q. 한반도 지역 탈춤 중에서 한양과 가까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산대놀이는 주로 궁중에서 많이 연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나요. A. 특히 송파산대놀이는 궁중 연회에 가장 많이 불려갔습니다. Q. 그렇다면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의 전승 주체를 담당했던 계층은 다른가요. A. 양주는 관원들에 의해 전승되었고, 송파는 장터의 장꾼들과 마을주민에 의해 전승되었으며, 주로 사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에 송파 장터에서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펼치던 놀이입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한다면 기원과 등장 인물이 다른가요? A. 기원과 유래를 보면 송파산대놀이와 양주별산대놀이는 차이점이 분명히 있다. 송파는 나루터여서 장꾼의 속성을 반영, 타령장단의 신명 나는 놀이춤으로 발전했고, 양주는 관에 대한 예속성 때문인지 염불장단에 의식춤이 발달했고,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니·당녀(唐女)·해산어멈·신할멈·무당탈 등이 남아 있습니다. Q. 송파산대놀이에는 양주별산대놀이의 대표적 춤사위 특징은? A.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한 반면, 송파산대놀이에서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이 발달한 것이 특징입니다. Q.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여러 배역의 탈을 쓰고 연희를 벌리는 탈춤의 매력은 무엇인지요. 예술성에 대해서 정의한다면 A. 춤(무용)과 음악·연극의 요소가 융합된 탈춤은 전통 공연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을 상징하는 종합예술입니다.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표현의 자유이고 바로 예술성의 조건이지요. 특히 사회비판적 주제는 현대의 다양한 예술창작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재창조되고 있습니다. 탈춤은 등장 인물의 성격을 과장·유형화한 탈을 쓰고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인간의 이중성 등을 적나라하고 신랄하게 풍자·비판하면서 관객의 동조·야유 같은 능동적인 참여까지 이끌어내 완성하는 적극적 소통 방식의 예술이기도 하다. 탈춤이 문화적 전통으로 공동체에 정체성과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Q. 그래서 탈춤을 보다 보면 이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A. 그래서 일년 중 하루쯤은 지배자 집단이 억압 받는 피지배자들에게 그날은 욕도 먹고 너희들 목소리도 한번 질러보라고 풀어줍니다. 그래서 탈춤의 마무리는 갈등과 대립의 화해, 나아가 상호존중을 통해 사회 전반의 조화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연희 종목 중 탈춤만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탈춤이 우리 무형문화유산을 넘어 인류가 함께 즐기고 향유하는 무형유산이 되었다고 봅니다. Q. 올해 무형문화유산 공개 행사에서 여러 지역 탈춤을 볼 수 있는데, 기대가 됩니다. A. 5월에는 2일 북청사자놀음, 19일 은율탈춤, 21일 고성오광대, 29일 송파산대놀이가 공개행사를 했습니다. Q.서울놀이마당에서 불편하신 부분을 호소하신 적이 있는데 개선이 되었나요 A.서울놀이마당은 송파산대놀이 전승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전국에 있는 무형문화재의 발표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서울놀이마당에서 전통 공연 외 다른 공연을 많이 한다고 했다. 그럴 때면 송파산대놀이 연습장인 전수관을 분장실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송파산대놀이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을 호소했습니다. 분장실을 따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했지만 아직도 변한 것은 없습니다. 송파산대놀이보존회와 각 지역 탈춤 보존단체들은 국가무형문화재·시도무형문화재 지정 등 체계적·지속적인 무형문화유산 보존·전승, 특히나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연과 체험·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한 활발한 전승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유네스코 인유무형문화유산 '한국의 탈춤' 등재에 큰 역할을 했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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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송파산대놀이 춤본이병옥(용인대 명예교수 ‘송파산대놀이’ 명예보유자) 1. 타령장단의 깨끼춤 1) 기본자세와 불림 ① 기본자세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려 발바닥 전체로 딛고 무릎을 엉거주춤하게 굽혀 중심을 낮춰 안정된 기마자세를 하고 양손은 뒷짐지기를 한다. * 몸체는 태권도의 기마자세와 같이 반듯한 안정자세이다. * 몸체가 앞으로 숙여지지 않도록 유념한다. ② 불림 장단을 청하는 신호로 악사를 향해 손짓하며 반주를 청하는 말과 동작을 이른다. 기본자세에서 악사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어깨 넒이로 내딛어 중심을 이동하면서 같은 쪽 손을 악사를 향해 내밀었다 가슴 앞으로 당겼다 하면서 타령장단 불림을 한다. 반대 손등은 허리 뒤에 놓는다 나비야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 나비야 너두 가자! * 손의 방향은 악사가 있는 쪽의 발과 손을 내밀면서 부른다. * 불림문구(타령장단) 「나비야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두가자!」 「금강산이 좋단말은 풍편에 넌즛듣고!」 「녹수청산 깊은골은 청룡황룡이 꿈틀꿈틀!」 「나귀등에 솔질해라 소상팔경 구경가자!」 「소상반죽 열두마디 휘휘칭칭 감아잡고!」 「인간이별 만사중에 독수공방이 제일섦다!」등 ③ 건드렁(장단먹기, 제자리) 불림을 하여 악사가 장단을 치면 거기에 맞춰 양손을 위로 쳐들고 어깨춤으로 어르면서 춤출 준비를 하는 동작이다. 그래서 이 동작을 ‘건드렁(장단) 먹기’라고도 한다. 발은 어깨넓이로 벌리며 무릎은 기마자세로 하고, 양손은 하늘을 향해 쳐들고 손바닥은 마주한 채로 손과 팔의 힘을 뺀다. 첫박에 왼쪽으로 중심 이동했다가 두번째박에 오른쪽으로 다시 셋째박에 왼쪽으로 넷째박에 오른쪽으로 중심 이동한다.(협의 필요) *손춤배역은 양손을 높이 들고(쳐들사위), 장삼춤배역은 양손을 옆으로 들어(들사위, 평사위) 좌우 흔들기 또는 제자리에서 어깨를 들썩인다. 2) 기본걸음 ① 깨끼걸음 깨끼춤의 기본걸음으로 2박 1걸음이며, 자진화장, 여다지, 멍석말이, 곱사위 등에서 걷는 걸음. * 무릎을 들 때 발은 쳐들거나 꺾지 말고 힘을 빼고 내린다. * 발이 땅에 닿는 순간에 무릎이 펴져서는 안 된다. ② 건들걸음 건드렁춤에서 1박 1걸음으로 건드렁, 거울보기, 빗사위, 뒷짐걸이 등에서 걷는 걸음. * 무릎은 허리높이로 들었다 내리며 걷는다. ③ 활개걸음 화장무, 긴여다지, 옴중과 노장의 장삼춤 활개펴기춤 등에서 걸어가는 4박 1걸음이며 ‘갈지(之)자 걸음’이다. *5~8박- 왼발을 들어 똑같이 반복하여 걷는다. 3) 기본춤 ① 화장무 양팔을 높이 들었다 이마 앞에 내려 어르는 팔소매춤[활개걸음]. *「화장」이란 한복의 팔소매(목덜미 고대에서 소매끝동까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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